고모는 새벽잠이 없다. 잠이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깨곤 한다. 그런 날이면 습관처럼 한숨을 뱉으며 방문을 연다. 그날도 어둠 속 홀로 남은 달을 향해 하소연이라도 하려는데, 열린 대문 사이로 누군가 유령처럼 쓱 지나가는 것 아닌가. 처음엔 귀신인 줄 알고 놀랐다가 두 번째 유령을 봤을 땐 정태인 걸 알아챘다. 그때부턴 아예 작정이라도 한 듯 달밤마다 깨곤 했고 그때마다 방문을 살짝 열고 대분 밖을 살폈다. 마치 틀림없이 또 지나갈 걸 안다는 듯이.
고모는 틀리지 않았다. 정태는 세 번째 지나갔고 운 좋게도 화장실 갔다 오다가 담장 너머 지나가는 정태의 뒤통수가 보여 유격대원처럼 재빨리 화장실 벽에 몸을 가린 채 고개를 쭉 뻗어 정태 뒤통수를 따라갔다. 고모 집에서 이장댁은 45도 각도로 보여서 정태가 이장댁으로 들어가는 걸 볼 수 있었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새벽에?’
새벽이슬 맞으며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시내까지 가서 놀다가 오는 건지, 정말 동네 여편네랑 짝짜꿍 난 건지 고모는 짐작이 안 됐다.
‘내가 세 번 봤으면 더 많이 돌아다녔다는 얘긴데.’
시골 마을에서 젊은 남자가 뭘 할까? 그것도 새벽에. 궁금하다기보다 수상했다. 고모는 처음부터 정태가 불길한 사람이라고 짐작했지만, 새벽에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걸 보니 자신의 추측대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을 저지를 것 같아 오싹했다. 부르르 한기까지 느껴졌다.
태양의 영역에 속한 새벽이 있고 달이 지배하는 새벽이 있다. 달의 새벽 중 달의 선함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어둠이 차지한 새벽이 있는데, 그런 새벽에는 까마귀도 울지 못한다. 고모는 그런 새벽을 귀신이 꼬리 치는 새벽이라고 불렀다. 지숙이 아버지가 집을 떠날 때도 모두가 잠든 새벽이었고, 이상한 아이를 낳아서 남편을 집 나가게 한 팔자 사나운 지숙이 엄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시간도 새벽이었다.
귀신이 꼬신 것 아니고서야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모진 짓을 한단 말인가. 게다가 시집온 지 삼 년도 안 돼서 시름시름 앓느라 밀밭을 병원비로 홀라당 까먹고 죽은 신랑도 새벽에 죽었다. 귀신이 꼬리 친 새벽에.
아무도 도와줄 수도, 말릴 수도 없는 새벽에 집을 나가고 생을 끊는 건 사람 짓이 아닌 귀신 짓이라고 고모는 술만 마시면 한탄하곤 했다. 술 마시고 싶어서보다 한탄을 하고 싶어서 술을 마시는 게 틀림없을 만큼 고모에게 일어난 불행을 술만 마시면 떠들었다. 마치 불행이 다른 집으로 갈까 봐 붙잡기라고 하듯이 주책스럽게 한탄을 반복했다.
달이 떴는데도 유난히 어두운 새벽, 그런 짙은 새벽마다 넋을 잃은 그들은 떠났다. 슬픔을 얼룩으로 남기고. 그러니 까만 새벽에 다니는 것들은 불길하다.
8.
“정태가 새벽에 다니는 게 수상하니 정태를 불러 뭘 하고 다니는지 알아봐요.”
이장한테 말하고 싶어도 이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에게 타박만 받을 것 같아서 모른 척하기로 했지만, 자신이 느낀 오한마저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세 정거장 떨어진 부천 마을에서 여학생이 실종된 날 정태는 어디 있었을까? 고모는 드러내 놓을 수 없는 의심이 쭈뼛 섰지만 침 삼키듯 삼켜버린다.
“내가 그럴 처지가 아니지.”
9.
“지랄하네,”
‘이 미친년, 모자란 년. 내가 너 때문에 팔자가 꼬여서.’로 시작한 고모의 욕 따발총은 아비어미 죽인 년으로 끝났다.
고모가 트랙터로 밭을 갈 듯, 욕으로 지숙이 귀를 갈아버린 건 지숙이가 막걸리병을 치우다가 엎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지숙이 마음도 갈아엎어졌다. 그래도 지숙이는 정태가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태어날 때부터 보고 지낸 마을 사람들과 고모는 무섭지만, 정태는 좋은 사람 같았다. 다시 일하러 가려고 일어나는 정태를 무심코 따라 일어나다가 치우던 막걸리병을 엎어버릴 만큼.
그래서 지숙인 고모가 소리를 빽빽 모질게 질러도 밭으로 걸어가는 정태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태는 막걸리병이 어찌 됐든, 지숙이가 욕을 먹든, 관심도 없이 노란 밀밭으로 걸어갔고 엎어진 막걸리가 평상 위를 끈적거리며 흉하게 엉겨 붙어 갔다.
고모한테 한바탕 욕을 들었는데도 지숙이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평상 위를 치웠다. 고개는 밀밭에 있는 정태를 보고 손만 평상 위를 허우적거려서 막걸리가 닦이는 게 아니라 파리가 엉겨 붙는 걸 막을 뿐이지만, 노랗게 물든 밑 밭만큼 지숙이 마음도 곱게 물들어갔다.
지숙이는 정태가 고개를 까닥이며 ‘왔어.’라고 인사해 주는 게 좋아서 따라서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막걸리를 가져가면 마을 사람 누구도 잘 먹었다고 하지 않는데 정태만 잘 먹었다고 인사한다. 정태는 나를 좋아해. 지숙은 정태를 생각할 때마다 입이 환하게 펼쳐진다.
10.
밀 수확이 끝나고 밀밭은 황량해졌지만, 마을은 풍요롭다. 마음도 주머니도 여유로운 가을이 되면 읍에서 축제가 열린다. 각 마을의 특산품을 전시해서 할인된 가격에 팔고, 서울에서 가수들도 내려오고 그야말로 잔치다운 잔치가 펼쳐진다. 평소 열리는 오일장과는 비교도 안 된다. 풍악을 울리고 먹거리 볼거리로 영산 읍이 들썩인다.
고모는 이날 만은 지숙이한테 너그러웠다. 지숙이가 좋아하는 선짓국을 사주고 신발도 사준다. 지숙은 일 년 중에 이날이 제일 좋다. 마을 사람 모두가 이날만은 지숙에게 친절하다. 일 년 중 가장 주머니가 두둑해서 인가보다.
"지숙아"
“...”
"지숙아"
“...”
"이년아 얼른 와"
신발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린 지숙이를 고모가 재촉한다. 고모가 좋아하는 가수가 서울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알록달록 형광 현수막과 리본으로 장식한 광장보다 신발이 더 예뻐서 지숙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신발을 고르느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숙아"
“...”
"지숙아"
“...”
“이년아”
지숙이는 이번엔 이년 소리도 못 들었다. 구두를 골라 야했기 때문이다. 고모는 지숙이를 한 번 더 보다가
“미친년, 이년아 정류장 앞에 있는 무대로 와. 알지 어딘지?”
라고 혼잣말인데 지숙이가 들을 것처럼 뱉고는 걸음을 서둘렀다. 어차피 지숙이는 장터에 있을 테니까. 또 이 읍 사람은 다 지숙이를 아니까.
지숙이는 파랑, 빨강, 노랑 구두를 보느라 눈이 휘둥그레 하다. 고모한테 어떤 걸 사달라고 해야 할까? 이만저만 고민되지 않는다.
“노란색”
지숙은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정태였다.
‘나를 좋아하는 정태다.’
등 뒤에 바짝 다가온 정태 때문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미소가 활짝 폈다. 꽃이 만개하듯이 활짝.
“왔어?”
지숙이 먼저 인사했다.
“오늘 입은 노랑 블라우스가 예쁘네, 노랑 신발이랑 잘 어울리겠어.”
"노란색?"
11.
즐거운 날은 해도 일찍 저문다. 아직 광장은 흥겨움을 정리할 생각이 없는 듯 요란했지만 해가 넘어간 광장은 어두워졌다. 고모는 공연이 다 끝나도 지숙이가 나타나질 않아서 욕이 자꾸 튀어나왔다.
"이 모지리는 뭐 하는 거야?"
슬리퍼를 벅벅 긁듯 장터를 왔다 갔다 하며 지숙이를 찾았지만, 덩치도 있을 만큼 있는 지숙이가 보이질 않았다. 마을 사람들한테 물어도 못 봤다고만 한다.
신발가게 들렸더니
"내가 지숙인지 뭔지 어떻게 알아요?"
괜한 성질이다. 확 뒤집어 버리려다 다시 돌아가는데
"그 병신년은 어딜 갔데?"
하고 신발가게 사장이 혼잣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괴롭혀도 남이 괴롭히는 건 못 보는 성질이라 고모는 신발가게 사장을 향해 돌진했다. 한 줌의 머리카락을 움켜줬을 때쯤 여기저기서 모인 사람들이 둘을 떨어뜨렸지만, 이미 신발가게 사장은 머리가 번개 맞은 듯 헝클어져 있었다.
"어디서 주둥일 함부로 놀려"
고모는 일침을 가하고 다시 지숙일 찾는다.
"지숙아"
“...”
"지숙아"
“...”
"이년이 어딜 간 거야?"
어디에도 지숙은 없다. 광장에 있는 사람들이 다 같이 “지숙아”를 외치며 구석구석 찾아도 없다. 마침 지나가던 이장에게 부탁해서 이장 차를 타고 서둘러 집으로 가봤지만, 집에도 마을 어디에도 없다. 사라졌다.
경찰을 불렀고, 마을 사람들이 흩어져 지숙을 찾았다.
"지숙아"
"지숙아"
지숙이가 대답 안 해도 이번엔 아무도 '이년아'라고 부르지 않고 끝까지 ‘지숙아’라고 불렀다.
12.
가을 축제가 끝나면 겨울은 서둘러 시작한다. 밀밭의 노랑 물결이 사라지자 스산한 낙엽과 마른 풀이 밀밭을 굴러다녔다. 그래도 밤이 되면 밀밭은 여전히 노랑 물결로 출렁인다. 긴 머릿결의 여인이 빗질하듯 바람에 노랑 물결이 흔들린다. 내게는 아직 가을이 지나가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언제쯤 나를 데리러 올까? 정태는 나를 좋아하는데 왜 아직도 나를 데리러 오지 않을까? 그날 날 위해 땅을 팠을 때, 내 심장이 피로 물드는 걸 그는 알았을까? 내게 친절했는데.
가을 단풍이 붉어지는 건 내 심장에서 흐른 핏빛 탓일까? 점점 추워진다. 아버지가 내가 창피하다고 집을 나가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나 때문에 못 살겠다고 청산가리 탄 막걸리를 먹지 않았다면, 고모가 이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정태를 따라가지 않았을까? 한 사람이라도 나를 아꼈다면, 정태가 한 친절은 덫이라는 걸 알아챘을까…. 땅속에 안 묻혔을까? 지숙이는 땅속에서 궁금하다.
“나 좀 꺼내 주세요. 밀밭이 노랗게 물들면 내가 입은 노랑 블라우스가 물든인 거예요. 나를 기억해주세요.”
ㅡ끝ㅡ
이 짧은 소설은 공대생의 심야 서재 '신나는 글쓰기 5기' 미션 중 [반 고흐의 그림 '수확, 몽마주르를 배경으로'를 보고 느낌 쓰기 혹은 이야기 만들기]를 위해 그림을 보다가 떠오른 이야기입니다. 상상 속 소녀, 지숙이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전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