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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짠 Sep 09. 2021

편의점 블루스 1

1 20시간 전, 118시간 전,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 시간 속으로

1. 120시간 전

밤 11시 11분. 왜 이 시간만 되면 편의점 문을 열까? 9시 30분 시작한 드라마가 끝나고 요가 매트를 펼치지만, 머릿속엔 술 한잔할까 말까를 왔다 갔다 하고. 마음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몸은 일어나고 현관문은 열리고 어느새 23시 11분 편의점 문을 연다.
선택지가 다양한 질문 앞에서 주저하게 되는 건 나뿐만은 아니겠지? 편의점다운 다양한 즉석 안주를 보석 진열대를 보듯 본다. `눈아, 왜 이럴 때 초롱초롱하니 나대지 말란 말이야.`라고 인생의 품위를 주문 걸어 보지만, 아버지의 잔소리처럼 효과 없는 지적질이다. 오늘도 역시나 23시 13분에 나는 안주로 무엇을 먹을까? 이것저것 두리번거린다. 그래도 안주 선택보다 술 선택이 더 어렵다. 술 종류가 아닌, 술을 허할까 금할까 말이다. 마실까 참을까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되는데도 둘 중 하나 선택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내 입만 만족스러울 것인가, 내 마음이 만족스러울 것인가는 미래가 있는 인간으로 살 것인가, 습관의 노예로 살 것인가로 해석되는 가능성과 퇴행성 사이의 갈등이니까.


매일 밤, 인생 수술 대 위에서 치료를 거부하고 뛰쳐나가는 환자 꼴이다. 22시 51분 요가 매트를 펼쳤을 때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제길, 오늘 또.


2. 118시간 전
어젯11시 8분 엘리베이터를 탈 때는 `그래 오늘이 마지막이야. 뭐든지 이별식은 있어야 하잖아?` 하며 술을 마셔야 하는 이유를 정당화시켰다. 사실 그게 더 정 떨어지는 비겁함이지만, 다음 날 숙취에 시달리며 깨기 전까진 약효가 있다.
외로움이 술로 안내하는 걸까? 의미 없는 삶이라서 그럴까? 편의점을 나와서 집으로 걸어가는 걸음은 안주 고를 때 보인 생기있는 모습은 사라지고 풀이 죽어있다. 가짜는 무엇이든 쉽게 풀이 죽는다. 술만 빼고. 독은 풀이 죽는 법이 없다. 중독은 한번 먹잇감을 움켜쥐면 절대 놓지 않으니까.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인다.

시지프스는 돌을 올리고 또 올리기라도 했지, 나는 술을 위장에 쏟아붓고 또 쏟아붓고 있다니. 벗어날 수 없는 벌을 받는 것처럼.
매번 '각오, 미혹, 갈등,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의 순서로 이어지는 술과의 재회. 한 번도 '다시는 안 마실 거야`라고 다짐할 때 의심스러워하지 않았는데, 한 번도 그 약속을 지킨 적이 없다. 나는 왜 이 짓을 반복하는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바라본 거울 속 낯빛이 시무룩하다.
문을 열고 티브이를 마주 보고 술을 마신다. 이 술엔 명분이 없다. 그냥 어제 마셨던 내가 오늘 다시 나를 초대했을 뿐, 내가 날 위해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난 어디서부터 인생에 심드렁한 사람이 됐을까? 기억도 못 할 어느 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없을 만큼 격앙된 시작됐겠지? 아마, 연애가 지독히 안 풀린 날이었으리라. 연애는 달콤함 뒤에 어떻게 그렇게 치명적인 칼날을 숨길 수 있을까? 살아갈수록, 연애할수록 양날이 다른 칼에 찔리고 또 찔린다.
그날 번만 선택한 줄 알았는데. `딱 한 번만 나를 놓치고 정신 놓고 싶어. 이 고통을 잊어야 하니까.` 하며 도망쳤을 뿐인데, 십 년 동안 밤마다 반복되다니. 인생은 미심쩍은 친구다.


어느새 술병이 다 비었다. 정신도 나를 놓쳐간다. 술병이 비워질 때마다 슬픔도 비워지면 좋을 텐데, 비워지는 건 내 정신 줄이다. 아…. 또 나를 놓쳐간다.


3. 96시간 전
땡그랑 편의점 문을 열면 출입문 종이 경쾌하게 울린다. 문 정면에 있는 안내대 벽에 걸려있는 시계와 마주 보며 들어갔다. 밤 11시 11분.
디지털시계가 알려주는 숫자는 빨간색이다. 마치 경고하듯 나를 째려본다. 타당한 경고를 무시한 적이 한두 번인가. 경고보다 인사가 더 중요해서 아르바이트생에게 고개를 까닥 숙여 출석 인증을 했다. `어? 모른척하네? 미친 거야?` 이 동네 이사 온 후 거의 매일 편의점을 들렀고, 밤에 오면 주로 이 청년이 있었다. 친절하고 바코드를 빠르게 클릭해서 '최단 시간 계산에 도전하고 있나요?'하고 물어보고 싶을 만큼 계산이 빨랐다. 한 번도 인사를 안 하거나, 안 받은 적이 없는데 오늘은 나를 무시했다. 안주를 고르는 설렘을 뺏어갈 만큼 불쾌했다. 원룸촌에 산 8개월 동안 이웃 없이 살았다. 원룸 건물 계단이나 편의점에서 반복해서 마주친 사람도 있지만,  인사를 나눈 사람은 없다. 우린 서로가 서로의 유령이었다. 유령 동네에서 유일하게 눈을 마주 보고 인사 나눈 아르바이트생이 - 8개월을 인사했지만, 유니폼에 있는 이름표를 본 적도 없어서 누구라고 부를 수도 없군. 쳇. - 모른척하니 이 동네에서 내 흔적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아무도 내가 이 동네에 살았던 걸 모르는 건가. 내가 죽으면 시체가 발견될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하긴,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23시 11분이면 술 사러 와야 할 누군지 모를 누군가가 안 왔어요.`라고 신고하지 않을 테니 난 이 동네에서 살았던 적 없이 사라지고 마는 건가.


`오늘은 술 마실만 하다. 한 병만 마시려 했는데 두 병 사야겠는 걸.`
그런데 내 몸이 어디로 빨려가는 것 같은데? 뭐지?


4. 72시간 전

23시 11분. 편의점 문을 연다. 시계를 확인하고 아르바이트생에게 인사를 하려다 멈칫한다. `어제 인사를 안 받아줬잖아?` 바로 안주가 놓인 코너로 간다. 23시 14분, 오늘도 안 주 고르기는 어려웠다. 안주를 집으려 손을 뻗는다. `어? 왜 안 잡혀?` 아무것도 잡히질 않고 뻗은 손만 공중을 좌우로 휘젓고 있다. 휘둥그레진 눈동자만큼 심장이 두근거렸다. 쿵쾅쿵쾅. 내가 정신착란을 일으킨 건가? 아니면, 마비가 된 건가? 내 몸을 두르려 본다. 나는 나를 만질 수 있는데, 왜 다른 건 만질 수가 없지? 소름 끼치는 불안은 잠재된 적극성을 끄집어냈다. 아르바이트생에게 달려가서 얼굴을 최대한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는 미동도 없다. 아니, 그가 미동이 없는 게 아니고 내가 안 보인다. 그에게.

놀라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안 보인다고? 편의점 테이블 맨 구석에 고등학생이 앉아 있었다. 등을 보고 앉은 학생에게 달려가서 `내가 보이니?`라고 물어볼까 하다가 마침  편의점으로 들어서는 여자 앞으로 갔다. 이럴 수가. 그녀도 나를 안 본다. 아니, 안 보인다. 편의점 문을 열려고 손을 내밀지만 역시나 잡히지 않고 유리문을 통과해서 밖으로 나왔다. `이런 거 영화에서 봤는데? 그럼, 나 죽은 거야? 귀신이야?` 온몸이 떨렸지만 정신 차려야 했다.


살아오는 동안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듯, 죽어서까지 나는 혼자 해결해야 했다. 다시 편의점 안을 보는데, 시계가 여전히 23시 11분이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 시간 속에 내가 있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주인공에게 무슨 일이?(그녀)에게 일어 날 놀라운 일이 여러분 곁으로 다가갑니다^^

목요 단짠스토리(소설)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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