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밀밭이 노랗게 물들어가면 마을은 설렘으로 분주하다. 뙤약볕에도 쉬지 않던 농부의 손길은 노동이었지만, 이 무렵은 농부의 손길이 장보기를 닮았다. 잔뜩 거둬들일 노란 밀이 한 해의 수고를 보상해 줄 걸 알기에 밀밭은 장터처럼 사야 할 물건, 사고 싶은 물건에 대한 기대로 풍성했다. 조금만 더 하늘은 높아져라. 밀이 황금빛으로 자라면 마을은 안도로 물들 테니까.
지숙이는 요즘이 좋다. 봄은 바쁜 만큼 농사에 대한 걱정으로 마을이 팽팽한데, 태풍을 이긴 여름이 지나면, 바빠도 가늠할 수 있는 수확 덕분에 모두가 유연해진다. 밭으로 가는 마을 어르신들 걸음이 가뿐하고 언성 높이는 일도 잦아든다. 수확이 시작되면 돈이 들어오고 시름겨웠던 한 해가 옷고름 풀고 달곰한 동침의 밤으로 들어가니 이 아니 좋은가 말이다. 마을은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분주하지만 즐겁다.
2.
느티나무가 유독 높은 곳에 있어서 여기 앉으면 밀밭 풍경이 환하게 보인다. 여기는 지숙이 자리다. 학교에 가지 않아서 나무 아래 원두막으로 등교한다. 고모 따라왔다가 고모가 밭일이 끝나면 고모와 함께 집으로 간다. 지숙이는 가방을 꼭 챙겨 온다. 옷은 아무렇게나 입으면서.
정말 학교라고 생각하고 가방을 챙기는 건지, 가방을 챙겨야 자신도 사람대접받는 것같이 여겨지는지 모를 일이지만, 서두르라는 고모의 뙤약볕 매미 소리 같은 잔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방을 주섬주섬 챙긴다.
"지숙아 "
"... "
"지숙아 "
"... "
두세 번 불러도 지숙이 못 알아듣자, 고모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뱉는다.
"이년아, 막걸리 받아와"
"야"
이년이라고 불러야 알아들을 게 뭐람. 지숙이는 마을회관 앞에 있는 슈퍼로 달려갔다. 달려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봤다. 고모에게 고객을 끄덕이지만, 사실 지숙이는 고모 뒤에서 일하고 있는 정태를 보는 거다. 이번 봄 갑자기 마을로 흘러들어와 이 집 저 집 일을 도와주는 뜨내기다. 뜨내기 정태나 마을에서 나고 자란 지숙이 고모나 남의 일하는 건 같다. 그래서 고모는 정태가 못마땅했다.
"지숙아"
"... "
"지숙아 "
”... “
"이년아"
"야?"
"뭘 그리 보니? 정신머리 없게. 주전자 갖다 놓으라고. 정태야 너도 얼른 일어나라"
정태는 남은 막걸리를 휙 마시고 자리를 일어나며 마지막 시선을 지숙에게 던진다.
"잘 먹었다."
"야."
3.
정태가 마을에 오고부터 지숙이는 자꾸 마음이 콩닥거렸다. 옆집 사는 영은이도 뒤 집 사는 미주도 중학교에 갔는데, 왜 느티나무 아래서 심부름만 하는지 지숙이는 알 수 없었지만, 고모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밖엔 알지 못하지만 학교가 가고 싶었다. 영은과 미주가 중학생 되고 학교 간 첫 주는 지숙이도 따라갔다. 고모한테 등 짝을 쩍쩍 소리 나게 맞은 지 다섯 번째 되는 날, 학교 가는 건 아픈 것이란 걸 알게 됐고, 그날 이후로 지숙이는 느티나무 아래로 등교했다.
하늘도 해님도 높아지던 느티나무 아래로 정태가 봄과 안 어울리는 겨울 점퍼를 입고 나타났을 때까진 심심했지만, 정태가 “학생, 마을회관에 화장실 열려있어?”라고 물었을 때부터 심심하지 않았다. 학생이라고 불러 준 사람이 나타났으니까.
그날부터 느티나무 아래로 등교해서 고모 뒤에서 일하는 정태를 바라보느라 농부의 바쁜 손만큼 지숙의 눈동자도 바빴다. 정태는 하루 세 번은 지숙을 웃게 했다. 아침엔 “왔어?” 막걸리를 마시고 나면 “잘 먹었다.” 밭일이 끝나고 집으로 가려하면 “수고했다.”라고 말하는 정태가 좋았다.
4.
고모도 마을 사람들도 모두 지숙을 '안 된 것'이나 '모지리'로 불렀다. 그들이 기분 좋을 때는 “에고, 안쓰러워라. 쯧쯧.” 했다가 그들이 기분 나쁠 때는 “어디서 저런 게 왔는지, 에구 모지리.”라고 타박했다. 마을에선 지숙이가 평범하지 못한 걸 두고,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모자란 구석이 있었다고 하고 누구는 뇌염에 걸려서 고열이 난 뒤부터 머리가 텅 비었다고도 했다. 그런 건 상관없었다. 지숙이는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이 없는 게 속상했다. 그런데 정태는 친절하게 말해준다. 느티나무 아래로 가방을 들고 나오면, 정태가 “왔어?”라고 인사한다.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듯 지숙을 대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함부로 해도 되는 사람으로 지숙을 대한다.
‘정태는 나를 좋아해.’
지숙은 봄부터 행복했다. 수확이 다가오는 가을이 대서야 행복해진 마을 사람보다 훨씬 먼저 지숙이가 행복했다.
5.
“과부한테 자식 맡기는 연놈이 어딨어? 도망간 놈이다. 뒤진 년이나. 그러니 머저리를 낳지. 에이 이놈의 팔자. 이년아 막걸리 받아와.”
고모는 밭일이 일찍 끝나면 낮술을 마신다. 고모보다 열 살은 더 많은 어르신 몇 분이랑 자주 어울린다. 그들은 모두 저녁밥을 지을 가족이 없어서일까? 육체의 고단함을 막걸리로 주물러 말랑말랑하게 하려 하지만, 말랑해지는 건 없고 대신 거친 입이 침과 욕만 뱉어댔다. 자신들의 신세는 처량해도 입은 만족시켜 줘야 한다는 듯 마시고 떠들고 뱉어댔다. 어떤 날은 지숙이가 막걸리 사러 슈퍼에 다섯 번이나 달려가야 했고 그런 날이면 이장댁 용이 아줌마는 저녁상에 올릴 된장찌개를 끓이려 장독대에서 된장을 푸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곤 했다.
“아휴, 마실 만큼 마셨네. 해 넘어가요. 자리 파하고 어서 쉬세요.”
맞는 말을 친절하게 하지만 누가 들어도 가시 돋은 말인 걸 안다. 사람도 일도 희망도 풍부한 마을에서 고모와 몇 분 어르신 그리고 지숙이는 불행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6.
"정태가 어제는 꼭두새벽에 이장댁으로 들어가데?"
"이장댁에서 셋 산 지 두 달 됐는가?"
"다음 달은 우리 집에서 세 살면 좋을 텐데. 나도 공돈 좀 벌게."
"뭔 소리야.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 정태가 이상해. 새벽이슬 맞고 어디 갔다 올까? 살림 사는 집만 있는 마을에 새벽이슬 맞고 갈 데가 어디 있길래?"
"과부한테 갔다 오는 갑주"
용 씨 아줌마 한 마디에 고모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용 씨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이년이 뭐라고 씨부렁거려, 이 마을에 과부는 나뿐인데, 그럼 내가 지랄 발광했다는 거야?"
"아휴, 형님 그게 아니라."
고모는 머리카락 몇 줌을 뜯어내고서야 분이 풀렸다. 정태가 왔을 무렵은 윗마을에서 학교 간다고 나간 여학생이 돌아오지 않고 사라져서 발칵 뒤집힌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마을 사람들은 정태의 등장과 여학생이 사라진 걸 연결 짓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고모는 정태의 공손함 뒤에 자꾸 쓴맛이 느껴졌다. 그래서 이방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대해 마을 사람들에게 우려를 표현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일손이 생겨 안심하고 셋 방을 내줘서 돈이 생긴 이장은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타박만 했다. 마을에서 자기 밭 없고 신랑 없는 유일한 사람이라 업신여김 받는다는 걸 확인한 꼴이었다. 그 뒤론 다시는 정태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둠은 어둠을 알아보는 걸까? 사는 게 벅찬 고모의 가슴 한구석에 마을을 싸질러 버리고 싶은 불덩이가 꿈틀거려서일까? 고모는 자신을 무시하는 마을 사람만큼이나 정태가 심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