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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짠 Mar 04. 2021

무용과 유용 사이의 너

사용되지 않는 것은 스스로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정리된다고?

K

목도리를 해야겠어요.

갑자기 차가워진 공기가 목덜미를 위협하네요. 

지난 며칠간의 마음고생이 가을을 재촉했나 봐요. 

돌아보니 그간의 이런저런 수고로움은 평소와 다른 그 월요일 아침에서 시작되었네요.

그 월요일 아침.


이년 전 면도를 시작한 아들을 위해 지름 15센티 너비의 원형 돋보기 거울을 화장실 세면대에 부착했었죠.

면도를 처음 시작한 아들에게 수염이 잘 보이는 거울이 필요할 것 같았거든요.

거울을 산 배려를 자못 뿌듯해 하며 면도하는 모습을 문 앞에서 바라보는 상상을 했지만, 아들이 그 거울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은 없어요. 사용되지 않는 사물이었어요. 그런데 그 아침, 이 년간 무용지물로 지낸 자신의 처지에 자결을 택하듯 거울은 세면대 위에 떨어져 있었어요.


 K, 당신은 '이 친구 감정을 지나치게 쓰고 있어.' 하며 슬쩍 입꼬리를 비틀고 있겠죠? 

그렇지 않아요.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돋보기 거울이 내게 말을 걸어오곤 했어요. 

쓰이지 않는 물건이 자리를 차지한 걸 보고 있으면 '너도 나처럼 찾는 사람이 없니?'라며 쏘아붙이곤 했죠.

그럴 때마다 

- 누구에게도 절대적이지 않은 이유가 뭘까? 

- 내 삶 속에서 이런 존재는 무엇일까? 

쓸쓸한 연결고리가 이어지곤 했어요.  


'사용되지 않는 것은 스스로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정리되는구나.'라는 생각을 손끝에 담아 거울을 집어 들었는데 뜻밖에 손에서 미끄러져 산산조각 깨졌어요. 


그때의 섬뜩함은 K 짐작이 되나요? 

사라져 가는 존재가 산산이 조각나서 그 형태마저 깨어져 버리다니. 

나는 마치 공포영화의 시그널 음악을 듣는 듯했어요. 

유리가 깨지는 것이 나쁜 징조라는 흔한 말을 넘어 나와 대화를 나누던 사물의 파손은 불행했던 삶의 굴곡이 다시 시작될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왔어요. 


내가 참 예민하죠? 

K 당신은 알아요. 

나에게 삶은 녹녹지만은 않았기에 불안감은 두더지 게임기의 두더지들처럼 불쑥불쑥 한결같이 내 삶에 간섭을 해대죠. 

그렇게 사소한 일에 불안을 불러들인 난, 내가 불러들인 불안의 실체들을 제대로 맞이해야 했어요. 

안경이 부러지고, 자동차가 고장 나고,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상사에게 그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사회생활을 모르느냐는 비난을 듣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난제의 철로 위를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죠. 녹초가 되어버린 마음과 비워진 지갑 그리고 나이값 못하는 쓸모없는 존재로 그 거울처럼 분리수거되어야 할 처지인데도 자멸도 퇴출도 못 하는 존재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어요.

난 결국, '거울의 저주'란 과장의 끝에 매달려버렸어요.


K, 당신이 곁에 있길 바랐어요. 당신이 나 대신 이 모든 일을 해결해 주었으면 했어요. 

그러나 늘 나는 혼자였고 누구나 혼자서 넘어야 할 산이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배웠기에 굳이 연락하지 않았어요. 

목요일 저녁에 이르자 완전히 지쳐서 소리 내어 울었어요. 

인생을 향해 투덜거렸어요. 

울다가 소주에 취해서 잠들었죠. 알코올이 내 삶의 썩은 살을 소독시키길 바라며.


희석될 것은 희석되어 버리고, 소독될 것은 소독되어 버리고 그 무엇보다 사라져야 할 것은 알코올처럼 휘발되어 사라져 버리길 바라면서요.


K 살아가는 일은 무용과 유용 사이의 위험한 유영일 뿐인가요? 


존재하고 사용하고 또 사용되고 그러면서 불행과 행복 사이를 날카롭게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어떻게 분리수거되어 갈까를 터득해 가는 과정일까요? 

죽음이 단지 분리수거란 결과물은 아니겠죠? 

실패도 불행도 때론 소용없음도 인생의 가치 있는 과정은 될 수 없는 걸까요?  


이런저런 생각들로 사나운 꿈자리를 보내고 다시 아침이 되었어요. 

금요일 아침. 아들은 울면서 잠든 엄마가 안쓰러웠나 봐요. 

"안경은 새로 하면 되고, 차는 고치면 되고, 돈은 벌면 되고, 핸드폰이 문제긴 한데. 발견한 분이 마음씨가 좋아서 찾아가라 연락 올 거야."

난 그제야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어요. 며칠 만에 마주친 눈이었어요. 


일어날 만해서 일어났을 뿐인 사소한 일들에 감정을 불러들여 '넌 불행해'라는 이름표를 달아 버렸어요.

감정에 휘감겨, 함께 사는 가족의 얼굴도 가을이 시작되어 바람이 나뭇잎을 곱게 물들이는 것도 모른 체 보냈네요. 

정신이 차려지기 시작했지요.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괜찮아'라고 말해주니, 그게 사실이라는 안심을 주었어요.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돋보기 거울이 사라지자 혼자 벽을 차지하게 된 커다란 사각의 거울에서 나를 찾아보았어요. 나는 안전하게 존재하고 있었어요.

 "휴."


유용함과 무용함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라봐 주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네요. 


아들을 배웅하고 문을 닫는데, 오늘은 왠지 '사랑해'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현관문을 여는데, 다시 문을 열 것을 알아챈 아들이 계단을 내려가는 모퉁이에서 고개만 살짝 내밀고 환하게 웃어주었어요. 

'아! 이거구나. 한 사람의 웃음이 다른 사람의 위로와 희망이 되는구나.'


웃음이 유용함이었어요. 꽃 한 송이가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채워가는 것처럼. 

그가 웃음으로 내가 웃었고, 내가 웃음으로서 그들이 웃는 하루가 되는 거였어요. 

이젠 뇌에 그림자 괴물 같은 감정을 담아 복잡하게 키워가기보단 먼저 웃어야겠어요. 

거울 속의 나를 향해 웃어주고, 만나는 이에게 웃음을 건네며 스스로 유용해질 거예요. 

누구에 의해서 사용되는 게 아닌, 내가 유용할 수 있는 선택들로 삶을 채워갈 수 있을 것 같아요.

K, '지나치게 들떴어.'하며 눈을 찡긋할 당신이 그립습니다.


그가 웃었다.
꽃향기가 삶에 나부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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