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이 내 어깨보다 넓은 이유
'어이가 없네’
나는 기가 차서 운동장을 바라봤다. 오늘은 유난히 좋은 날이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빨강, 노랑. 파랑, 스펀지밥 우산이 물방울을 재잘거리며 운동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커다란 어항 속에서 색색의 물고기들이 나란히 헤엄치는 것처럼 고와 보여서 더 기가 찼다.
‘저렇게 예쁜데 내 우산은 저 속에 없어.’
오늘따라 새침데기 정애가 말을 걸었고, 미술 시간에는 스케치를 잘해서 칭찬도 받았다. 싫어하는 우유 당번도 무슨 상황인지 오늘은 안 해도 됐고 무엇보다 점심시간은 놀이동산에 온 것처럼 신나게 놀았다. 새로 산 원피스를 입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 원피스를 ‘행운의 원피스’라고 부르기로 했다. 모든 일이 수월했고 충분했다. 평소에 신경 쓰이고 부담되던 것들이 화해의 손짓을 한 좋은 날이었다.
그런데 5교시까지 낌새도 안 주더니 종례를 마치자마자 소나기가 내렸다. 이건 반칙이다. 친구들과 복도를 빠져나올 땐 “웬일이야. 비 맞으면 어떡해.”라고 호들갑을 떠는 서윤에게 “선생님이 소나기라고 했으니까 금방 그칠 거야.”라며 의젓하게 말했는데, 막상 현관에 서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거 소나기 맞아?’ 소나기라 하기엔 너무 방정맞게 쏟아지는 빗줄기였다. 마치 비상벨이 울리는 것처럼 요란하고 불길했다.
어쩔 줄 모르고 멈춰있는데, 나를 두고 울보 서윤이와 싸가지 정애 그리고 제일 친한 친구 윤서는 빗속 운동장으로 분홍, 주홍, 노랑 날개를 펼치며 사뿐히 걸어 들어갔다.
“예린아, 내일 봐.”
저렇게 해맑게 인사하면 어쩌라고.
친구들은 우산 없는 내가 안 보이나 보다. 평소엔 같아가자고 하더니. 정말 같이 가야 하는 날은 내빼듯 재빨랐다.
‘쟤들 엄마는 일기예보를 빼놓지 않고 보나? 따로 안내 문자가 가나?’
서윤이 엄마는 어떻게 소나기가 내릴 줄 알고 오셨을까? 서윤이네 옆집 사는 정애 우산도 챙겨서 말이다. 아침엔 윤서가 우산을 들고 와서 놀렸는데 역시 윤서가 하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친구들은 손가락 속 빗물처럼 빠져나가 버렸고 빗소리가 더 거세져서 아우성처럼 들렸다.
“우산 없어?”
민서였다. 학기 초에는 둘이 친했는데 무슨 일이지 서먹해진 사이다.
“응. 괜찮아. 소나기라 금방 그친 데. 좀 있다 가려고.”
“같이 갈래?”
민서가 우산을 펼치며 그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내 쪽으로 우산을 슬쩍 밀었다.
“아냐, 먼저 가. 난 좀 더 감상하고 갈게.”
민서는 고개를 두 번 끄덕이더니 총총히 우산 속으로 사라졌다.
‘무슨 미친 소리야.’ 뭘 감상한다는 건지 자신이 한 말이 소나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이제 현관에 남은 건 나와 3학년 현수뿐이다.
‘둘 뿐이야?’
전교생 중 우산이 없는 학생이 둘 뿐이고, 그 속에 내가 껴 있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했다. 그 순간 망설임 없이 운동장으로 뛰어갔다. 우산이 없는 두 명 중 한 명으로 현관에 서 있느니 비를 맞는 게 나았다.
창피함이 발사 신호가 됐다. 나는 있는 힘껏 달렸다. 빨리 달리면 우산 없는 내가 보이지 않을 것처럼 달렸다. 빨강, 노랑 파랑 스펀지밥 우산 사이로 새로 산 주홍색 원피스가 빠르게 젖어갔다.
“전교생 중 우산 없는 게 왜 둘 뿐이야? 왜 그중에 내가 껴야 해? 소나기잖아. 그런데 다들 어떻게 알고 우산을 준비했지? 왜 엄만 맨날 그런 것도 못 챙겨? 왜 나만 비를 맞게 해!”
비 오는 거리를 우산도 없이 달리게 한 건 엄마가 아닌데도, 마음은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비를 맞게 했다고 아니,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빗물보다 눈물이 세지고 있었다.
모두가 있는 걸 가지지 못하면 창피하다는 걸 그 어느 때보다 절절히 느끼게 하는 빗속이었다. 비를 피해 달리며 처음 알게 됐다. 비 오는 날 우산이 없는 건 다른 사람보다 못난 걸 증명한다는 것을. 있어야 하는 게 없는 건 창피한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지켜 줄 사람이 없는 사람은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창피가 수치심으로 자라는 이유가 사랑이 덮어주지 않을 때인가 보다. 비에 젖어가는 내 모습이 초라해서 더 미칠 듯이 달렸고 마음속 소나기는 점점 커졌다.
평소엔 걸어서 7분 거리를 2분에 달려 건널목까지 왔다. 숨이 찼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는데, 빨강 신호등 앞에선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신호등마저 원망스러웠다.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게 창피해서 무단횡단을 하기로 했다. 차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서 가능해 보였다.
‘이 정도면 건 널 만해.’
발을 쭉 뻗어 건널목으로 뛰어들려는 순간, 누군가 어깨를 잡았다. 놀래서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경찰 아저씨가 아닌 민서였다.
“야, 무단 횡단하면 어떡해?”
“그게. 근데 넌 아까 나보다 먼저 갔잖아?”
“너 우산 없는 게 신경 쓰여서. 같이 쓰려고 다시 가는데 네가 막 지나쳐 뛰어가는 거야. 부르는 거 못 들었어?”
나는 수치심과 원망에 빠져서 주변을 볼 수가 없었다.
“파랑 불이다. 가자.”
나는 민서가 내민 우산으로 들어갔다. 작아 보였던 민서 우산 속은 제법 넓었다.
같이 쓰라고 우산이 어깨보다 넓은가 보다. 민서와 함께 건널목을 건너며 안도의 숨을 내쉬니 비로소 거리 풍경이 보였다. 건널목 앞에서 나물 팔던 할머니는 그 앞 슈퍼로 피신했는데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슈퍼 아주머니와 웃고 계셨다. 빗물이 튀어 지나가는 언니의 구두를 적시자 ‘어머’라고 피아노 건반 '솔' 소리를 냈다. 빗속에도 거리는 멈추지 않았다. 소나기는 곧 그칠 거니까.
건널목을 다 건너고 나니 마음이 이상했다. 수치심이 쏘아 올린 원망이 사라지고 없었다. 소나기는 아직 안 그쳤지만 내겐 우산을 씌워 줄 친구가 있었고 그 안도감으로 충분했다.
“민서야. 고마워.”
“나도 얼마 전에 우산 없어서 홀딱 젖었어. 그건 창피한 게 아니야.”
우산이 없는 게 창피하지 않다는 건지, 홀딱 젖는 게 창피하지 않다는 건지 민서 마음을 알 순 없지만, 다음엔 우산이 없어도 창피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우산을 잘 챙기고 싶다. 누군가 비를 맞으면 내가 씌워 주고 싶다. 오늘은 유난히 좋은 날 맞다.
창피함이 사랑으로 감싸지지 못하면 수치심이 된다. 수치심은 외부로부터 강요되기도 하지만 어디서 시작했든 내면에서 키우게 되면 괴물로 변하게 된다. 당신 안에 괴물이 자라지 않기를. -박 아민 단 짠 노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