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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짠 Mar 25. 2021

실패 마일리지 사용법

팔자가 세다=실패가 전공 vs 팔자는 하기 나름=실패 마일리지


팔자가 세다 = 실패가 전공이다


'팔자가 센가 봐.'

그 말이 아직도 가끔 귓가에 윙윙거린다. 파리 소리처럼.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던 파리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윙 윙 소리가 신경 쓰여서 하던 일을 멈추고 이리저리 손을 뻗어 파리를 잡느라 정신없어진다. 굳이 존재를 드러내지 않아도 될 것들이 정체를 내세우면 골치 아파질 뿐이다. 하얀 스케치북 위에 연필로 점 하나 찍었을 뿐인데 더는 하얀 스케치북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파리 소리처럼 '팔자가 세다'라는 한 마디가 까만 점을 찍어버린 적이 있는데, 마치 인생 이력서에 "넌 되는 일이 없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실패가 전공이지?"라고 갈겨쓰는 것과 같았다.

어쩌다가 그런 말을 들었을까? 지금부터 당신이 궁금해하는 팔자가 사나운 이유를 들려줄 테니 먼저 이것부터 약속해야 한다. 파리처럼 윙윙거리지도 하얀 스케치북에 점을 찍지도 않겠다고.


통증과 전이, 나쁜 건 다하는 실패

실패를 많이 한 인생은 아니다. 대학도 한 번에 붙었고, 직업적으로도 능력보다 성과가 좋은 편이다. 브런치 작가도 됐다. 세 번 떨어지고 네 번째 합격했으면 잘했다고 생각한다. 직업도 작가의 길도 작정하고 시작한 게 아닌, 우연히 시작됐지만, 열심히 하고 있으니 '천직과 꿈' 둘 다를 가진 운 좋은 사람이다.

실패보단 성공한 삶이 아닐까? 그런데 실패한 사람에게나 어울릴 '팔자가 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해가 안 될 거다. 이 정도면 팔자 운운하는 말을 들을 삶은 아니니까. 그런데 인생 이력서가 단 몇 줄로 정리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우여곡절이 많았으니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 인생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구불구불 고갯길이었다. '실패가 많으면 팔자가 사납고, 팔자가 사나우면 실패가 많다'라는 말이 적용될 만했다.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하신 것도, 40에 내가 이혼한 것도, 건널목에서 차에 치여 왼쪽 무릎을 다친 것도 실패고 조산 위험이 있어서 응급실에 실려 간 것도 산모로서 실패다.

실패는 남 탓 내 탓을 가리지 않고 인생에서 걸려 넘어지는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가고 싶은 학과를 가지 못해서 꿈을 분실한 채로 살아온 것도, 사업에서 꿈을 대리 만족하려다 적자가 난 것도, 아버지 병원비를 감당하느라 큰 빚을 진 것도 실패로 분류된다.

도전에 관한 결과만이 실패, 성공이 아닌 살아가는 모든 일이 실패와 성공으로 불릴 수 있다.

그렇게 어디서도 출몰 가능한 실패는 불행히도 독자노선을 걷지 않는다. 실패란 아픔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누구 탓이든 어떤 상황이든 실패하면 아프기 때문이다.

실패할 때마다 많이 아프다. 상황이 아픈 건데 마음도 몸도 따라서 아프게 되는 걸 보면 실패는 전이되는 성질도 있다. 하나의 사건으로 모든 걸 무너뜨린다. 도미노 같다.


실패 이력서의 하이라이트

가장 큰 실패가 경제적 손실일까, 건강을 잃는 것일까?

그 둘은 무엇이 먼저 시작했든 나중엔 나란히 진행되고 치명적인 면에서 성질이 같다.

학원 개원을 앞둔 일주일 전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왼쪽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셨고 반신불수의 투병생활이 저항 한번 못 해 보고 시작됐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고통받는 아버지를 지켜보는 심정에 고액의 병원비가 더해져 이중고가 삼중고 사 중고로 규모를 키우며 1년, 2년 해를 넘겼다. 4년이 지났을 때는 병원비에 대한 스트레스와 병간호로 자주 학원을 비우다 보니 200명의 학생 수를 지키던 학원은 위태로워졌고 직원들 월급 주기도 급급했다.

마음보다는 몸이 버티기 힘들었는지 덜컥 암에 걸렸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치료 가능한 초기 단계라서 간단한 수술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로 각막궤양, 신장염 등으로 한 두 달씩 입원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나 입원보다 힘든 건 다른 데 있었다. 입원할 때마다 민폐 환자가 되는 것이다.


네 번째 입원했을 때였다. 각막궤양으로 실명 위기가 왔다. 한쪽 눈은 정상적으로 볼 수 없는 상태였고 아무도 내 곁에 없어서 다른 보호자의 도움을 받는 민폐 환자로 지냈다. '한쪽 눈이라도 보이니까 괜찮지 않을까?'하고 짐작하지만 그렇지 않다. 왼쪽 눈의 통증이 오른쪽 눈 뜨는 것도 힘들게 해서 거의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식사와 화장실 가는 건 눈 감고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때마다 "저 좀 도와주세요"를 외쳤다. 민폐 환자로 지낸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쓸쓸한 것도 한두 번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입원실 민폐 환자가 된 건 다리를 다쳐 입원했을 때이다.

신호를 무시한 폭력 운전이 나를 포함해 두 명을 친 교통사고를 냈다. 난 그저 건널목을 건넜을 뿐인데, 입원해서 다리를 못 쓰고 누워있어야 했다. 왜 '피해자'라고 불리는지 알게 한 사고였다.

다리를 못 쓸 때는 화장실 갈 방법이 없다. 그땐 남편이 있었지만, 출근해야 했고 간병인을 쓸 만한 여유도 없었다. 어쩌겠는가. 부탁하는 걸 잘 못 하는 성격 따윈 던져버려야 했다. 도움 청하는 게 아무렇지 않은 듯 "저 좀 도와주세요."를 외쳤고 인심 좋은 보호자들은 그때마다 돌아가며 나를 휠체어에 태워 화장실로 데려다줬다.

환자와 보호자가 모인 병실이라 '도와주세요'가 통했지만 웃으며 휠체어를 밀어주고 식판을 옮겨주신 그분들은 분명 선했다. 이처럼 고마운 사람은 의외로 아는 사이가 아닌 경우가 많다.


다섯 번째 입원했을 때였다. 그때도 한 달 남짓 병원에 갇혀 지냈다. 사는 곳이 아닌 서울에서 투병생활을 한 창할 무렵, 퇴원과 입원이 반복되자 인생이 위기로 여겨졌다.

'어떻게 하면 힘이 날까?'를 궁리하다가 지인들에게 음악을 보내기로 했다. '음악 인사'라는 이름으로 보냈다. 아침마다 들려주고 싶은 음악을 찾아서 친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즐거움이 병실의 무거움을 씻어주었다. 음악을 따라 콧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러나 희망을 찾아 준 음악 배달은 오래가지 못했다. 동료 원장이 보낸 문자를 본 후 음악을 전송할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박 원장은 팔자가 센가 봐요. 벌써 몇 번째 입원이죠? 아무튼, 힘내세요.'

모든 희망을 무음 처리시키는 한 마디였다.

아침마다 보내는 음악이 귀찮았을까. 평소에 내가 미웠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때 두 가지를 알게 됐다 '함부로 하는 말이 독처럼 번져간다는 것''지인이란 알고 지내는 사람일 뿐 인생을 나누는 친구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마음에 퍼져버린 아픔이 컸다. 그 후 오랫동안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우여곡절 많다고 해서 감히 함부로 '팔자가 세다'로 정의한 것은 나빴다.

그따위 말을 한 사람의 입을 꿰맬 수가 없어서 내 마음의 빗장을 꿰매버렸지만, 오랫동안 윙윙거려 내 삶에 불쾌한 '점'이 되었다.

하얀 스케치북 위의 까만 점이 신경 쓰여서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투병생활은 나의 삼십 대 후반을 다 가져가 버렸고, 6년의 반인 3년은 나도 투병생활을 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6년 동안 참 많은 것들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후 사라졌다. 아버지, 나, 사업 그리고 가정까지도.

지금도 가끔 6년의 마지막 날인, 그날이 악몽처럼 기억난다. 모든 것을 잃은 날. 그날은 3평 남짓한 원룸 방에 혼자 앉아 마음의 고통이 숨을 쉴 수 없게 하고 죽게 할 수도 있다는 걸 확인한 날이다.


바닥을 치면 그다음 순서는?

마음의 고통이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었지만 살고 싶었다.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께 "도와주세요."를 외쳤다. 병실에 있을 땐 보호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병실 안이라서 가능했지 병실 밖에선 도움 청할 요령조차 없었다. 누구라도 붙들고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없었다. 사람에겐 없었다. 그래서 신을 찾았다. 가장 센, 가장 자비로운 신께 현실이란 병실 안에서 "도와주세요"를 외쳤다.

그리고 교차로를 보며 일자리를 찾았다. 닥치는 대로 일했다. 영어강사로 과외 선생으로 새벽엔 녹즙 배달원으로 일하고 또 일했다. 거리에도 티브이에도 사람이 많았지만 내 곁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삼 년 후 다시 아들과 함께 살 집을 구했다. 아들을 키우기 위해 일을 더 늘려야 했지만, 그날이 내 인생 최고의 기적이다.


실패가 많았다. 그런데 난 실패했기 때문에 다음 걸음을 걸을 수 있었다.

이혼했기 때문에 자립하려고 노력했고, 사업에 성공도 실패도 해봐서 명함보다 어떤 하루를 사는가에 관심을 갖게 됐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 봐서 아픈 사람을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게도 됐다. 무엇보다 타인에게 함부로 인생 잣대를 갖다 대지 않는다. 


완전하진 않지만 성장한 나를 발견하곤 한다. '내일 쓸 천 원이 있을까?'를 걱정할 때도 돈이 생기면 책을 샀고(읽진 않았지만), 혼자 술 취해 울다 잠들곤 했지만 잠에서 깨면 '세상을 바꾸는 15분'을 듣고, 커다란 전지를 사서 '나의 5년 후'를 사진과 글로 꾸며서 벽에 붙여 놓기를 반복했다.

아무도 없지만 나는 있었고. 꿈은 없었지만 한 발 더 앞으로 나가려는 희망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실패가 스펙이라고.


실패가 스펙이다


구글에서 인재 채용을 할 때, '어떤 도전과 실패를 했는가'를 중요한 이력으로 본다고 들었다. 그 이유는 인재 채용 시 '적응력'을 특히 중요시 보는데, 실패를 극복해 본 사람이 자신의 실수도 인정하고 그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고 또한 협업도 잘하기 때문이라 한다. 물론, 난 도전하다가 실패한 건 아니라서 구글 입사 요건에 맞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구글이 원하는 인재상에서 '실패가 스펙'이라고 말하는 근거를 찾을 수 있진 않을까?

'워킹홀리데이', '세계 일주', '00 프로젝트 참가'같은 훌륭한 도전을 해낸 청춘들 소식을 들을 때마다 멋지고 부러웠다. 날기 위해 날개를 수없이 움직이는 수고를 했을 뿐 아니라, 처음 날아오르는 두려움도 이겨낸 그들이 훌륭해서 부러웠다. 

예전엔 부럽기만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블록버스터 급은 아니지만. 독립영화 '산전수전 편'에 낄 만큼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인생을 살아왔다면, 내 삶도 살아온 날마다 도전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파리 소리가 윙윙 거리냐고? 날개가 살랑살랑 날갯짓하며 또르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느라 파리 따윈 점이 돼서 땅속에 묻혔다.

지금 부모로부터, 배우자로부터, 일로부터, 꿈과 건강으로부터 실패를 강요당하고 있다면? 괜찮다. 바닥에 점 한번 찍고 다시 일어나면 된다. 아프긴 하지만 그래야 단단해져서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다.

 

"팔자는 하기 나름이고 실패도 마일리지가 적용된다는 것을 기억해 주세요. 자, 그럼 실패가 스펙 맞죠?"

지금, 어깨 움츠린 나와 당신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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