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드려라! 열릴것이다.
" 자기야, 집에 별일 없어? " (남편)
" 왜?? 무슨 일...??? (라떼마마)
" 아니 별일 없냐고...! " (남편)
" 무슨 일????? " (라떼마마)
비행기를 타고 6시간이나 가야 하는 나라에서 일을 하는 남편과 보이스톡을 하던 그날을 기억한다. 결혼 8년 차, 내용 없는 두 마디를 듣고도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아이의 아빠는 불안하고 다급한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했다. 그날 밤 남편과 나는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흉터가 남을 절망적인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어금니를 깨물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의 긴장을 풀려고 차를 마시는 동안
" 엄마~~ 엄마~~~~ "
하며 낄낄낄 까르르 배시시 웃어대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2019년 2월 22일] 남편의 폭탄 선언 다음날 아이의 생일을 준비하는 일은 감정노동이었다. 맑고 아름다운 아이의 웃음을 지키기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하겠다고 결심해야 했다. 나는 써니의 엄마니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신 불안한 상황에서 아이에게 최소한의 온실은 만들어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8년 동안의 신데렐라 같은 삶은 종이로 만든 가짜 달, 허영이 만들어 낸 삶을 그린 일본 영화 '종이달'과 너무도 닮아있었다.
서른여섯, 그렇게 엄마 사람은 밥벌이를 찾아서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드라마 속 강단이 가 더 처절하게 리얼리티 버전으로 탄생하던 날이었다.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숫타니파타' 중에서 -
매일 이 글귀를 생각하며 5년간의 공백을 끝내기 위한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아이의 아빠가 부재하는 동안 1년 365일 쉬는 날 없이 참 열심히 살았지만 그것을 증명할 방법도 표현해야 할 최소한의 키워드도 생각나지 않았다. 외식프랜차이즈기업을 거쳐 CS강사로 일을 했었다. 남들을 가르치기 위해 최소한의 내공과 해당 분야에 대한 나만의 정의는 만들어야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아서 서른 살에 대학원에서 HRD를 전공했다. 하지만 그것은 영어를 전공하는 것과는 결이 다른 분야였다. 학교를 다니며 수도 없이 여성의 경력단절에 대한 리서치를 했고 커리어를 주제로 논문을 썼지만 정작 나의 커리어는 참 오갈 곳 없이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굵직굵직하게 교육과정 개발도 하며 강의를 한 것이 그나마 내가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아주 최소한의 능력이었다.
대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병원 컨설팅 회사의 컨설턴트 & 강사, 삼성전자 제품 교육강사, 명품 브랜드 매니저, 병원 상담실장, 화장품 제품 강사 등등 아주 작은 겹침이 있는 곳, 해당 업무는 내가 좀 더 특별하게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에 열심히 입사지원을 했다. 자기소개서도 공을 들였다.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취업을 원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던 내가 직접 취준생이 되어보니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여기는 면접이라도 보러 오라고 하지 않을까?라는 기대감과 아무리 그래도 이런 곳은 안 간다는 근거 없는 우월감이 교차하며 인터뷰 연락을 기다렸다. 어떤 곳은 연락이 없어서 직접 전화를 해서 물어보기라도 했다. 애가 타면 없던 용기도 생긴다.
" OO에 지원한 지원자 OOO입니다. OO건으로 확인 차 연락드렸는데 면접자에게 따로 연락이 간 건지요~"
" 네, 이미 개별 연락 갔습니다. "
" 연락을 못 받았는데, 혹시... 제가 서류에서 불합격한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을까요? "
"........... "
" 혹시, 당일 불참자가 생기거나 면접 기회 주시면 가겠습니다. 연락 부탁드립니다."
자존심이 상했다. 떨어졌다는 실망보다 이유를 알려주지 않고 매정하게 밀어내는 태도, 불편하게 이런 것 따위는 묻지 말아 달라는 뉘앙스가 나를 더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27살 연봉 4000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급여를 받던 나를 지워야 했다. 강남역 빌딩의 숲에 있었던 회사를 다니며 커피와 도넛 향내가 매일 진동하던 사무실에서 꿈을 키우던 나는 도대체 어쩌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을까? 한 달에 150만 원을 준다고 하는 작은 사무실에서 마저 거절을 당하고 나서야 1층 아래에 지하 10층 깊이의 바닥이 있음을 확인했다.
나의 경력에 가장 씽크로율이 높았던 회사는 병원 컨설팅 회사였다. 그나마 연봉이 3000만 원이 넘는 그 곳이 매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입사를 원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다. 연구소 컨설팅 업무 수행능력, 교육과정 개발, 강의, 무엇보다 CS적인 감각은 내가 나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강점이었다. 그동안 수행했던 프로젝트를 정리해서 가져갔고 자기소개서 준비, 면접 준비에 며칠 동안 공을 들였다.
기다리던 문자메시지가 왔다
인터뷰를 했던 선임 컨설턴트에게 연락을 했다. 꼭 알고 싶었다. 내 부족함이라도 짚어준다면 보완해서 한 번 더 지원하거나 비슷한 분야의 다른 회사에 입사지원에 꼭 도움이 되고 싶었다.
" 저희 업무는 출장이 많은데 아무래도 결혼도 하셨고 아이가 어려서 함께 일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비슷한 친구가 있었는데 결국 그만뒀어요~ "
면접 내내 타 지역 출장이 많아서 아침 7시에 동대구역에서 출발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며 부정적인 메시지를 드러냈다. '도대체 나를 왜 면접에 오라고 했을까? ' 화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부당한 면접.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면접의 기회가 주어졌으면 그 시간 동안 나는 나를 잘 팔아야 했다. 결국 나는 나를 어필하지 못했고 상대는 살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두려움의 안개가 내 마음에 자욱했다. 그래도 여긴 되겠지.... 되겠지.. 했던 곳들이 하나씩 불합격하면서 나의 쓸모없음에 깊이 좌절했다. 아이가 14개월 되던 해에 기러기 엄마로 한국에 홀로 남겨져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나의 쓸모는 먹이고 씻기고 입히는 일로 닳고 닳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깊이 사랑을 주고, 감정을 알아채려 하고, 마음으로 들으려 하는 능력이 길러지면서 좀 더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해서 더 잘 들여보는 눈이 생겼는데 왜 나는 이토록 쓸모없는 존재가 돼버렸을까?
싱글맘, 싱글 파파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한 사람의 부재로 인해서 홀로 어린아이를 키우는 일과 경제적 책임을 동시에 다하는 모든 사람들의 힘듦에 대해서 진지해졌다.
며칠이 지나고
한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 이미정 씨 되십니까?
안녕하세요! OOOOOOO라고 하는 회사 OOO 차장입니다. 사람인에서 이력서를 보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
나는 그때 깨달았다... 세상에 열심히 내가 있다고 신호를 보내는 일이 왜 필요한지를....
나를 백수로부터 구원해 줄 회사를 담당자의 전화 한 통으로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