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면의 영업사원은 내게 "총무야!"라고 말했다.
5년 만의 출근길에 심장이 벌렁벌렁 콧구멍도 벌렁벌렁 터질 것 같았다. 나의 바이오리듬을 집-안에서 집 밖으로 꺼내오는 일은 그냥 구두 한 켤레를 신고 조금 더 각진 토트백을 들고 현관문을 나서면 되는 그런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불편한 상황으로 들어가 일의-언어로 소통을 하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일, 일과 일을 연결하며 제대로 회사가 굴러가기 위해 내가 나사처럼 콕 박혀있어야 했다. 걱정이 밀려왔다.
옷 없는데 뭐 입고 가지? - (집에는 온통 맘 룩에 플랫슈즈와 크록스뿐)
소개는 어떻게 할까? - (그래도 강사였으니까 이건 어렵지 않겠지만 너무 오버하면 어떻게 하지?)
머리는 묶을까? - (그냥 풀어도 괜찮을까? - 머리 풀면 꼭 뭐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
점심은 누구랑 먹게 되는 걸까? - (제발 뒷담 화하는 점심시간은 아니길)
내 자리는 어디일까? - (사무실 비품과 pc, 전화 등등 챙겨주는 사람은 있겠지?)
보고서 수준은 어디쯤 되려나? - (파포는 자신 있다 했지만 세상이 그동안 너무나 바뀌었고, 엑셀은 더하기 빼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딱히 이로울 게 없는 걱정들로 2-3시간 겨우 눈을 붙이고 20개의 알람을 맞춰놓고 첫 출근을 했다. 그동안 간절히 바랬던 상상 속의 워킹맘의 이미지로 '입고-바르고-신었는데' 출근한 지 1시간 만에 나의 로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선우씨, 그 옷 벗고 유니폼 입으세요!
40대 후반의 이 곳 터줏대감처럼 보이는 여자 과장님은 자신이 입고 있는 것처럼 내게 유니폼을 입으라 했다. 목에 두르고 온 에르메스 스카프를 풀어서 가방에 넣어두고 5천 원쯤 되어 보이는 스카프를 착용했다. 시무룩한 내게 소크라테스 님이 다가와 속삭이는 듯했다.
네 주제를 알라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그렇게 오버해서 입고 오지 말라니까!
여기가 아직도 테헤란로 어디쯤 빌딩의 숲 사이에 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고!)
그 날 이후 알게 되었다. 본사에는 여자 직원이 5명 정도 되는데 모두 하나 같이 은행 창구와 같이 창구에서 근무를 하고 있으며 직책은 총무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아마도 회장님이 보험 영업소의 관리자로 일하시던 그 시절 영업소에는 여자 총무들이 있었다고 하고 그로 인해 회장님은 여자 직원들은 유니폼을 입히고 총무라고 불렀다고 한다. 회사의 규모와 매출액을 생각했을 때 마케팅 부서가 없고 교육부서가 없다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여자 직원들은 말 그대로 [경리/회계 + 고객상담]을 모두 묶어서 총무라는 이름으로 일을 했다. 심지어 여행업무를 하는 나의 포지션도 예외는 아니었다.
총무라는 직책이 싫었다. 이유는 내가 그동안 사용하던 '총무'라는 단어는 모임이나 계에서 돈 관리를 하는 사람을 뜻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세계에서는 그랬다. 총무라는 단어만 들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권한 따위는 없는 것 같았다.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기획하고 개선하고 공유하고 이런 일들과 총무라는 단어는 물과 기름처럼 동동 떴다. 유니폼과 명찰을 바라볼 때마다 투명한 상자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연차가 높아져도 업무가 노련해져도 직급은 높아지지만 업무는 변함이 없고 그다지 큰 영향력도 없어 보였다. 이 모든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냥 자존심이 상했다.
걱정스러웠다. 가계부 하나 쓰는 것도 어려운 내가 총무 업무라니. 한 달은 버틸 수 있을까? 그만두지 않고 버텼다. 설사 그만두더라도 여기에서 분명 작은 점이라도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을 꼭 만들어 본 후에 그만둬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어렵게 구한 직장. 180만 원이지만 정규직이라는 타이틀이 나를 붙들었다. 비록 월급은 작지만 여자 직원들은 굳이 큰일이 아니면 내보낼 일도 없다고 했다.
여행사업부 이선우 사원
출근 후 나의 소속은 여행사업부였고 직급은 사원이었다. 직급이 사원인 이유는 '여행업무 경력이 없어서'다.
그런데 이상했다. 여행업무 경력이 없어서 (사원) 직급을 붙였는데 직책은 여행오퍼레이터와 관련도 없는 총무라니.
나이 서른여섯에 사원의 명함을 받고 지인들에게 줄 용기가 없었다. 자다가 이불 킥을 날리고 싶을 만큼 쪽팔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근하지 않는 삶보다는 만족했다.
근로계약서에 사인하는 것을 멈칫하는 내게 내 윗 사수는 고민되면 사인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출근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인수인계 기간 동안 열심히 배워서 빨리 업무에 적응하겠습니다.
영업본부 아침 조회가 끝나면 회사 한편 여행 부서의 부스로 영업사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나는 크루즈 담당 오퍼레이터였다. 크루즈 여행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타이타닉호가 전부인데 그런 내가 크루즈 여행 담당업무를 맡게 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상반기 일정표를 뽑아서 영업본부로 들락날락 거리는 어느 날 내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총무야! 박스 하나 좀 가 와봐라!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내게 총무야 라고 했다. 총무님도 아니고 OO씨도 아니고 총무야'라고 하며 반말을 했다. 삼십 대 중반이 넘어서니 초면의 사람들에게 반말을 듣는 일이 드물었다. 업무 공간에서 누군가 나에게 이런 말투와 뉘앙스로 이야기를 하는 일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총무야! 이거 하나 무라!
총무야! 니는 언제 왔는데?
총무야! 결혼은 했나?
총무야 나이는 몇 살인데?
총무야! 상조하나 들어라!
총무야! 종이컵 다 떨어진 거 안 보이나? 좀 갖다 놔라!
총무야 물걸레 어딨니? 이거 좀 닦아라!
총무야 , 총무야, 총무야..
회사에서 내 위치는 카스트제도 가장 아래에 있었다. 마치 신데렐라 놀이를 하면서 네, 언니. 네, 어머니 하는 것처럼 매일매일 "네, 여사님, 네, 지점장님" 하며 항상 5분 공손 조가 되어있었다.
회사에 존재하는 모든 관리자와 여자 총무들은 영업사원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듯했다. 알게 모르게 관리자와 사장, 여자 총무들에 대한 시시콜콜한 평가와 소소한 이야기들이 직접적으로 회사의 오너에게 전달되었다. 조금이라도 더 명 줄을 길게 하기 위해 내근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영업사원의 눈치를 알게 모르게 의식하며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처음 본 사람이 반말을 하고 개인 비서를 부리는 것처럼 심부름 비슷한 일을 시키는 것이 너무나 당연시되는 문화에 반감이 생겼다. 대부분은 50대 60대 여성 영업사원인데 같은 여자끼리 좀 더 친절하고 따뜻하면 안 될까?라는 생각을 그 당시엔 했었다.
출근하는 매일매일이 의문 투성이었다. 그동안 내가 겪어온 세계를 기준으로 삼으면 모든 것이 이상했다. 합리적이지 않은 모든 것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내 모습을 보며 내 윗 사수는 며칠에 걸쳐서 회사가 돌아가는 상황과 구조에 대해서 설명을 하며 나를 이해시켰다. 답답했지만 업계의 분위기와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었고 나의 답답함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 스트레스를 극복하려면 방법은 하나라고 생각했다.
심부름꾼이 아니라 서비스맨이 되는 것
내 존재에 대한 의미를 전환하며 이후로 좋은 일이 계속 생겼다. 코로나에 크루즈 업무를 담당하는 것은 오늘 당장 집에 가라고 해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고 더 필요한 자리로 옮겨졌다. 처음에는 거부하고 싶을 만큼 유니폼이 싫었지만 내 마음에 잔존하는 허영과 거만함을 받아들이고 내 처지를 인지하자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처음으로 유니폼을 입은 셀카를 찍어보기도 했다. 사람들이 예쁘다고 했다. 유니폼이 잘 어울리고 친절하게 전화받아줘서 고맙다고 했다. 영업사원분들이 먹을 것을 아침마다 갖다 주었다. 삶은 계란, 샌드위치, 과일, 커피, 삶은 감자, 요구르트, 떡...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누가 총무야! 하면 네, 여사님, 네~ 하며 넉살 좋게 웃기도 했고 점점 내 마음의 여유가 함께 자라났다.
경력단절 엄마의 성장기록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