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월급날은 친정엄마 월급 드리는 날
일을 시작하면서 엄마의 시간을 사야 했다. 아이만 봐주시면 충분하다고 말씀드렸으나 엄마는 살림도 70% 정도 도와주셨다. 퇴근하면 집이 말끔했다. 싱크대 거름망에 남아 있는 음식물 쓰레기, 세탁기 거름망에 넘칠 것 같은 먼지 찌꺼기, 음식물이 조금 묻어난 재활용 쓰레기 정리와 같은 티 나지 않지만 여자를 참 성가시게 하는 일들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해 주셨다. 냉동실 문을 열면 촘촘하게 아이에게 먹일 국이 종류별로 소분되어 있었고 혹여나 내가 일을 하면서 아이가 뒤쳐질까 저녁시간 30분은 아이에게 호비 교재를 함께 공부하며 아이의 학습도 신경 써주셨다. 식판에 엄마가 아이의 반찬을 담아내는 모양새를 보면 인스타에서 요즘 엄마들이 좋아요를 100개는 누를 것만 같았다. 신이 내린 친정엄마를 둔 셈이다.
첫 월급을 받던 날, 100만 원을 현금으로 인출해서 봉투에 넣어 엄마에게 드렸다.
말라꼬 주노. 괜찮다. 니 써라.
엄마는 고생해서 벌어서 이렇게 다 주면 어떻게 하냐고 손사래를 치셨지만 마지막까지 주머니에 넣어드렸다. 아마 다른 집에 아이를 봐주셨으면 제대로 된 한 달치의 월급을 받으셨을 텐데 엄마라는 이유로 제 값을 쳐 드리지 못해서 되려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스물다섯에 받은 첫 월급은 백화점 명품 매장에서 카드를 긁으며 스쳐 지나갔다. 즐거움과 쾌락의 차이에 대해서 곽세라 작가는 이렇게 이야길 했다. 시간이 흘러서 되돌아보았을 때 행복한 마음이 들면 즐거움이지만 수치스럽다면 그것은 쾌락이라고. 스물다섯 나의 월급의 쓰임은 쾌락이었다. 비록 절반밖에 안 되는 작은 돈이었지만 5년 만에 힘들게 취업해서 벌어본 176만 원은 내게 정말 소중했다. 퇴근 시간 전까지 내내 빨리 엄마에게 갖다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후로 퇴사하는 그날까지 월급날만 되면 항상 엄마를 드릴 기쁨이 가장 먼저였다.
돈을 드리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그에 대한 해소 욕구였을까? 아니면 이제 받을 만큼 받은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라도 하고 싶어서였을까? 엄마에게 돈을 드릴 수 있는 괜찮을 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옛날 아빠가 퇴근길에 붕어빵이며 치킨이며 사 오실 때의 느낌과 상당히 닮았으리라 생각된다.
어버이날에 비누꽃을 주문해서 현금을 넣어 선물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히죽히죽 웃음이 났다. 아마 나는 처음으로 나 스스로 누군가에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에 대한 묘한 뿌듯함이 스멀스멀 올라왔을 것이다.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집에서 내가 돌볼 엄마랑 아이가 기다리는 것 같았고 빨리 가서 챙겨주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퇴근길에 종종 간식을 포장했다. 아빠가 좋아하시는 단팥빵, 튀김 소보루, 치킨, 순댓국, 갈비탕, 피자, 초밥...
언제부턴가 아빠는 검은색 봉지를 기다리셨고
오늘은 또 뭐고?
하며 그 봉지를 반기셨다. 사람 노릇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적당한 시기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일과 달랐다. 땀 흘려 일을 하고 번 돈으로 가까운 사람들을 기쁘게 하니 내 마음속에 자욱했던 우울함이 점점 걷혔다.
행복의 문이 열렸다. 내가 벌어서 내가 산 맛있는 음식을 제비처럼 받아먹는 아이의 입을 보며 책임감이 생겼다. 남편에 대해서 생각했다. 대출받아서 대학원을 보내주는 줄도 몰랐는데 졸업식 당일, 누구보다 그가 기뻐했다. 나이 어린 와이프에게 자신의 노력으로 해줄 수 있는 것에 존재감을 느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웃으면 웃을수록 남편은 더 해주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꼈으리라. 일을 하면서 가장의 책임감에 대해서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다. 조금 덜 아팠다. 내게 사람을 보는 눈이 하나가 더 생기니 같은 상황도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여름휴가로 제주도를 다녀왔다. 가족들의 비행기 티켓과 독채 펜션, 렌트비 2박 3일간의 식비를 오롯이 내가 부담했다. 300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이었다. 단 한 번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비록 읍씨.. 살지만.. 한 번은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여행 마지막 날 밤 아빠의 생신 파티를 했다. 아이가 노래를 불렀고 한자리에서 모두 케이크를 후~ 불며 시간을 보냈다.
일하기를 참 잘했다.
일하기를 참 잘했어.
정말 잘했다.
정말 잘했어.
봉투에 편지를 적어서 아이의 손을 빌렸다.
" 써니야, 편지 배달 좀 해줄래?
이거 할머니께 갖다 드리면서
엄마가 고맙습니다. 했어요. 하고 전해줘 "
엄마의 시간을 헐값에 팔지 마세요.라고.. 봉투에 깨알 같은 글씨를 적었다. 그리고 약속했다. 비록 지금은 월급이 너무 작아서 이만큼만 드릴 수 있지만 꼭 엄마의 시간을 제값에 쳐드리는 아니 곱절로 쳐드리는 괜찮은 딸이 되겠다고.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있음이 부담으로 다가왔던 시기가 있었다. 한 달, 두 달, 견디며 일을 하는 동안 조금씩 단단해져 갔다. 어떤 일을 해서라도 아이의 배를 곯게 하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자존심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엄마 사람은 한 뼘 더 성장했다. 딸은 자신의 딸을 지키려고 엄마의 소중한 시간을 싼 값에 살 수 밖에 없었다. 사랑은 그래서 내리 사랑이다.
<경력단절 엄마의 성장기록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