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줄곧 나와 친구처럼 함께 따라다니는 몇 개의 단어들이다. 한달 자기발견을 하면서 단 한 순간도 떨어져있어 본적 없는 이 3개의 단어가 내 고민의 방향을 정확하게 가리킨다.
결혼을 하고나면 대학생때는 비슷비슷하던 친구들의 사는 모습이 하나, 둘 달라진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친구도 그렇지 않은 친구도 고민의 무게는 비슷하다. 여유가 있는 친구들은 돈의 출처자를 항상 신경쓰며 살아야한다. 받는 만큼 다른 정서적인 노동, 육체적인 노동으로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른다. 없는 친구들 또한 돈을 벌어다 주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게된다. 이는 결혼의 유무와 관계없이 가족관계에서도 경제적 능력과 힘을 행사하는 범위는 상관관계가 지극히 높을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는 역할분담을 하는 것 뿐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사람 사는 이치가 자연스럽게 돈을 주는자와 받는자로 구분이 되며 받는자는 주는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없다. 나의 고민도 이 범주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결혼을 해서 살다보면 삶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완전히 예상할 수 없는 길로 빠지게 될 때가 있다. 가족관계로 얽혀있는 순간 내 일이 그의 일이 되고 그의 일이 곧 내 일이 되기 때문이다. 깊은 구덩이에 빠졌을 때 가장 후회 했던 일이 육아로 일을 쉬며 전업 엄마라는 직업으로 경력이 이동된 일이다.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전업 엄마라는 직업을 갖게 되는 순간 수입이 없어진다. 분명히 가치있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정적인 위기가 생겼을 때 전업엄마였던 나는 내 삶의 통제력이 전혀 없었다. 분명히 내 앞에 주어진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벌인 일로부터 내 삶까지 큰 파도가 밀려오고 거센 바람이 불었다. 내 인생을 구할 수 있는 권리가 나에게 없어서 생긴 불안함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당시에 유시민 작가의 강의에서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 존엄한 삶을 살기 위한 전제 조건이 자기결정권을 가지는 것인데 이것을 가지려면 경제적으로 다른사람에게 의존하면 안된다는 내용을 보았다.
이 순간부터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줄곧 자기결정권, 경제적 자립이라는 키워드는 나를 집요하게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팍팍한 생활비로 남편이 모르는 카드 빚이 있는 친구의 애절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한번 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를 돌보더라도 내가 내 밥벌이를 할 수 있어야 삶이 흔들리지 않겠구나! 하고 말이다.
그렇게 워킹맘이 되었고 나의 커리어 성장을 글로 쓰게 되었는데 처음 제목이 라떼마마, 엄마독립 프로젝트였다. 이 브런치북의 내용은 무조건 싫으면 그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타인으로부터 부당한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나를 단단히 지키면서 살아가려면 경제적인 자립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싶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지 못해서 나를 지키지 못할까봐. 3-4살 토끼같은 딸을 지키지 못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둘이 살기에는 너무나 넓었던 신혼집의 평수에서 정확히 절반의 평수에 살게 된 지금. 물리적인 불편함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하는것은 나중에 또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좀 더 의연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처하는 내가 되지 못할까봐. 그래서 다시 당시의 힘든 감정을 또 겪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이다.
그래서 부모님이 금수저를 물려주시든, 남편이 은수저를 쥐어주던간에 내 숟가락은 내가 챙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강한 집착과도 같은 신념이 생겼다. 아무것도 모르시는 부모님, 거리를 두는 한발 치 먼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악착같이 사는 나를 보며 그만 좀 일을하라고 하지만 더이상 바람에... 휘청거리는 내가 되고싶지 않다.
너무나 동경했고.. 흠모했고.. 지지했던 사람에게 완벽히 의지만 했기 때문에 고스란히 받는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내 일을 하고 싶어하는 엄마들에게,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망설이는 엄마들에게 나의 커리어 성장 스토리를 들려주곤 했다. 우는 분들도 있었고 멋있다고 박수를 쳐주는 분들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진심이 담긴 내 목소리로 뼈있는 말을 할 수 있다.
나는 나를 단단히 지킬 수 있는 든든한 사람이 되고싶다.
나는 나의 안전한 울타리가 되고싶다.
자립이라는 키워드가 집요하게 따라다니니 자연스럽게 다른 대상으로까지 확장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이 키워드는 자아가 수축하는 지향점으로 부터 만들어진 키워드다. 부정적인 동기부여로부터 생긴 키워드라 삶의 목적, 내가 하는 일의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진 삶을 스스로 세우기 위해서 세상의 문을 열고 나온일
아이의 자존감과 자신감-> 관계를 세우기 위해서 소통에 시간과 노력을 들인 일
나의 커리어를 세우기 위해서 막막한 일들에 도전을 해보고 어떻게든 완결을 한 일들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뾰족해지고싶다. 그 뾰족함의 끝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호하지만 그 일의 결과는
사람들을 스스로 서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가치다.
그래서 얼마를 벌어야 자기결정권이 지켜질까요? 하는 질문을 누가 내게 던진다면
첫번째 목표는 남편의 연봉만큼 벌게 되었을 때 나도 딱 한번은 내 목소리를 내 보고 싶다.
싫으면 싫다고
내가 알아서 잘 살 수 있다고.
핵사이다 같은 발언을 꼭 한번은 해보고싶다.
남편은 여전히 나와 아이를 위해서 고생을 하고있고 어쩌면 그것에 대한 미안함이 변질된 컴플렉스, 핸디캡이 될 수 도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한번은 큰소리 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