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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제베 Jan 27. 2020

하루 만에 끝난 명절

아비투스 취향에 대하여

언젠가부터 명절 연휴가 다가오면 보이지 않는 무거운 그림자가 내 머리를 짓누른다. 마음의 게으름이다. 그래도 자신의 역할은 해야 한다. 의무이기 이전에 도리다.

이번 명절은 두 아이들이 참석하지 않았다. 취준생의 딸아이는 아직 취업의 관문을 넘어서지 못해서인지 스스로 고립을 택했고, 연휴를 놓칠리 없는 아들은 친구와 제주여행을 떠났다. 아이들의 선택을 강제하지 않았지만 96세가 되신 어머니의 아쉬움이 없을 리 없다.   


현대의 명절은 연휴라는 인식이 팽배해져 간다. 나에게도 전통주의 습성들이 퇴색되고 개인주의 익숙함으로 길들여져 가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아포리즘이 생겨난 무렵부터 만인주의에서 개인주의로의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느 시기를 무 자르듯이 구획할 수는 없지만 나의 철학과 역사 상식으로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스스로의 생각이 자아를 키웠다 생각하고, 커졌다 생각하는 자아를 과신하는 이기심은 인지상정일 수도 있기에 말이다.


오전에 성묘를 마치고 오후엔 문중의 사촌 큰 형님과 문중묘 조성을 위한 답사를 다녀왔다. 이제 나로서는 설날의 용건은 모두 끝난 셈이다. 요즘은 시골에 간다 한들 인사 다닐 곳이 많지 않다. 구순의 어머니를 남기고 아버지 형제와 외가의 어머니 형제도 모두 북망산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더 이상 시골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기에 오후에 어머니를 모시고 광주로 돌아왔다. 나로서는 하루 만에 명절이 끝난 이다.



누나 동생들의 고스톱은 아직도 로컬룰이 확정되지 않아서인지 소란스럽기 그지 없다.


지난 추석 명절에는 서울의 누나 부부,여동생 부부와 함께해서 북적이는 명절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명절 기분이란 게 다름 아닌 화투판이 벌어지는 모습이었다. 명절의 낯선 모습은 아니지만 우리 집에서는 이례적이었다.

작년부터 누나와 여동생들은 어떻게 배웠는지 시골집에만 오면 화투판을 벌인다. 나와 아내는 고스톱을 배우지 않았기에 주로 어깨너머로 구경만 하는 상황이다. 오고 가는 농담성 한마디 한마디는 주위 모두를 즐겁게 했는데, 화기애애한 이 분위기에 끼지 못하고 옵서버 같은 멘트만 날리는 내 자신을 두고 취향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기도 했었다.  


읽지는 않았지만 익히 알려진 부르드외의 <구별짓기>를 생각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살아온 환경과 문화적 환경에 따라 문화 계급이 생긴다. 취향이라는 것은 ‘자신보다 낮은 수준에 있다고 여기는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구별 지으려고 하는 상위 계급적 상징‘이라고도 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상당히 불편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취향이란 이분법적으로 좋다 나쁘다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고상하다고 느끼는 취향이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기도 하고, 미슐랭 식당의 요리가 아닌 골목 식당의 라면을 먹고도 누군가는 행복에 겨워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어떠한가. 나의 취향은 내가 생각해도 꽉 막힌 구석이 있다. 소주 파티에 가서도 기어코 맥주를 마시고 가족과 모인 화투판에 끼지도 못한다. 여행지에 가서도 책을 읽고 클래식 음악회는 가도 트로트 음악회는 가지 않는다. 이런 나의 취향도 내 자신을 타인과 구별 지으려고 하는 이미지적 허영 때문인 것일까?  


나는 소주를 부정한다거나, 화투를 부정한다거나, 트로트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소주를 못 마시기에 맥주를 마시는 것이고, 유도를 하다 부상을 당한 무릎 연골 때문에 화투 치는 자세를 오래 유지하기 어려워 흥미를 잃었을 따름이다. 여행지에서 책을 읽는 것은 교양이기 이전에 나에게는 휴식에 더 가깝다. 트로트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클래식이 더 좋아서 클래식 음악회에 가는 것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취향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부르드외 말처럼 후천적 아비투스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코 취향에는 계급이 있을 수 없다. 다만 대중적이냐 아니냐의 차이가 계급이라는 착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근데 계급의 기준이 뭐지?

이거야말로, 이런 계급이야말로 '생까고' 사는 배짱이 필요할 것 같다.



아제베의 일상에세이는

[딜레탕트 오디세이]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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