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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제베 Oct 09. 2020

슬픔의 심로

남자의 고독 그리고 여자의 외로움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슬픔이여 안녕>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울함과 나른함,
이 낯선 감정에 슬픔이라는 무겁고도 멋진 이름을 붙여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코로나 거리두기에 편승하여 느끼게 되는 피로감이 나른함으로 이어진다. 삶의 외로움까지도 불러온다. 작년 이맘때 생의 아픔을 느꼈던 10월이라서 그런가? 아무튼 이 낯선 감정도 슬픔이라 할 수 있을까?      

18세 소녀였던 사강은 슬픔이란 무겁고도 멋진 이름이라고 표현했다. 멋진 이름이라고는 했지만 슬픔이라는 단어의 영향인지 소설 제목인 '안녕'의 의미가 봉주르(Bonjour)가 아닌 아듀(Adieu)의 느낌이 든다.


슬픔의 멋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제 3자의 입장에서 견지하는 미화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뭔지 모를 슬픔의 멋은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에서 주인공 에마는 낭만적 연애와 격정적인 사랑을 누리면서도 스코틀랜드의 산골 집에서 애수에 젖고 싶어 했다. 외로움의 슬픔을 멋진 감정으로 누리려는 마음인 것이다. 에마에게는 미화되는 ‘여성의 외로움’ 이다.      


김남조 시인의 詩句처럼 가난한 이름의 고독이 아니더라도, 이가 시린 겨울밤은 아니더라도, 노상 술을 마시는 남자들이 있다. 감성이 무르익는 자정의 시각에 이르면 사나이 순정 영화가 허무하게 끝나듯 엔딩크레딧 속으로 책임감에 젖은 슬픔이 배어든다. 남자들에게는 어울리지도 않고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슬픔이다. 남자에게는 슬픔 대신 자기 연민이 있다. ‘남자의 고독’ 이다. 가정의 권력의지를 과용한 자학이라고도 한다.     


남자들의 술좌석 이야기는 대체적으로 정치와 경제 그리고 여성 이야기 속으로 레퍼토리는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뫼비우스 띠를 돌고 또 도는 그 쓰디쓴 삼류 철학의 결론은 무엇일까.


마지막 건배 잔을 들고서 의기투합을 한다. ‘인생은 독고다이!’ 라는 결론을 유혹한다. 이때 분위기를 맞춘다고 ‘나도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겠소’와 같은 추임새를 넣으면 안 된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오히려 헛발질의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말이다. 알코올에 마취된 주당에게는 그냥 '옳소!' 라는 인기발언만이 필요할 따름이다.


‘인생 독고다이’의 외침은 소크라테스派와 같은 오묘~한 철학의 느낌이 든다. 뭔가 대단한 결론을 얻은 듯한 긍정의 분위기가 고조된다. 하지만 ‘무소의 뿔’ 이라는 추임새는 이소크라테스派와 같은 꼰대적 강의 같은 느낌에 묘~한 부정의 분위기를 갖기 때문이다.


결국 이소크라테스派를 보내고 소크라테스派 끼리의 의기투합이 다시 시작된다. 이렇게 2차 뫼비우스 띠는 자정을 넘어 돌고 돌고 또 돌기만 한다. 결국 삼류 철학의 결론은 없고 자학만이 빈 잔에 남는다. 물론 나의 이야기다.      


여자는 눈으로 눈물을 흘리지만 남자는 눈으로 흘릴 눈물이 없어 마음으로 운다, 라는 말이 있다. 눈물과 슬픔은 같은 말일까? 여자의 외로움과 남자의 고독. 무엇이 다를까 만은 프랑수아즈 사강처럼 마음의 슬픔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보고 싶다. 천상의 목소리로 여겨지는 엄지애의 <슬픔의 심로>가 어울리는 날이기도 하고.    

 

아제베의 음악이야기는

[딜레탕트 오디세이]에서 계속됩니다.


엄지애 <슬픔의 심로>  

https://youtu.be/d4EPoOITF6U  

출처 : 유튜브 우종민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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