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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제베 Nov 09. 2020

서 있는 사람들

여유로운 삶과 풍요로운 삶

학창 시절에 보았던 단막극 TV드라마를 지금도 기억한다. 제목은 잊었지만 신구와 강태기가 주연했던 단막극이었다.


대학교 앞에서 선술집을 운영하는 신구의 가게에 대학생이었던 강태기가 단골로 드나든다. 그는 항시 친구들을 몰고 와 막걸리잔을 돌리며 3류 철학과 낭만을 외친다. 한바탕 떠들썩했던 술좌석이 끝나고 친구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면 계산대 앞에서 초조해하는 강태기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외상을 사정하려는 것이다. 가난한 강태기의 빈주머니 사정을 잘 아는 신구는 가난에 주눅 들지 말라며 씽긋 윙크를 보내며 외상술을 허락한다. 강태기와 신구에게는 신뢰와 인정이 통한 정다웠던 순간들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참 세월이 흘러 직장생활에 정신없어하던 강태기는 문득 신구와의 옛 추억을 떠올린다. 우여곡절 끝에 어느 뒷골목에서 초췌한 모습의 신구를 만난다. 오랜만의 재회이건만 신구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강태기는 외상술의 낭만과 정다웠던 두 사람의 옛 추억을 토해낸다. 그렇지만 신구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첫마디에 강태기는 절망한다.     


자네 돈 좀 있나? 물 먹인 소를 팔면 많은 돈을 벌 수가 있다네.’        


강태기 눈에는 변해버린 신구의 모습만이 원망스럽게 비친다. 몇 날을 술을 마시며 괴로워하던 강태기에게 경찰서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물 먹인 소를 불법 유통했던 신구는 현행범으로 유죄를 받게 될 상황에서 강태기를 한 번 만나게 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강태기를 맞이한 신구의 얼굴 표정은 의외로 밝았다. 얼마 전 보았던 초췌한 모습의 신구의 표정이 아니었다.     


자네를 만나고 자수를 결심했다네. 그동안 삶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산 나의 잘못을 알게 되었네. 내가 변했다며 호통 치던 자네의 분노에서 말일세. 고맙네. 죄 값을 치르고 예전의 우리로 다시 만나세.’          



주말에 어머니를 모시고 잠실에 있는 여동생 집을 다녀왔다. 올해 들어 처음 가졌던 가족과의 서울 나들이였다. 30여 년 KS인증 업무를 해왔던 여동생이 희망퇴직을 했다. 50대에 접어든 여동생은 아직 미혼이기도 하다. 혼자 살아가는 동생을 볼 때마다 오빠로서 마음이 무겁다. 다행히 동생은 나름 재테크를 하여 은퇴 후 경제자립은 이뤄놓았기에 그나마 한시름 덜고 있을 따름이다.      


장기 운전의 피로에 잠시 뒷방에서 누워 휴식을 취하는 데, 동생의 통화 내용이 들린다. 전세를 내놓은 집의 인터폰에서 잡음이 인다는 것이다. 임대인 동생에게 임차인의 컴플레인이 온 것이다. 인터폰 수리를 위해 공구함을 들고 동생을 따라나섰다. 분해를 해보니 예상대로 인터폰 수명이 다 된 것이다. 인터폰이 교체되는 동안 잡음만이라도 없애고자 전선을 끊어 임시 처리를 해놓고 나왔다. 골목길을 얼마쯤 걷다가 동생이 나를 보며 입을 연다. ‘오빠, 고마워.’     


동생의 고맙다는 말에 진정성은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애증을 느꼈다. 나를 바라보는 동생의 눈에는 ‘나이브한 오빠’고, 동생을 바라보는 나의 눈에는 ‘정확한 여동생’이다. 동생의 눈에는  허당끼기 다분한 오빠고, 오빠의 눈에는 계산끼가 다분한 동생이다.     


올해 전 국민 긴급 재난금이 나왔을 때 이야기다. 가족에게 만약 1,000만 원의 공짜 돈이 생긴다면 어디에 쓸 것인가를 물어보았다. 동생은 주식에 투자하겠다고 했고, 나는 여행을 즐기겠다고 했다. 우리에겐 어떤 생각이 현명한 정답이 되는지 모르겠다. 대신 동생을 인정하는 것은 있다. 취향은 나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삶이 여유로운 동생을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여유로운 삶과 풍요로운 삶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은퇴한 동생에게 이제는 여유로운 삶에 풍요로운 삶이 가미되면 더 좋겠다.



브런치 글을 읽던 중 우연히 아름다운 글을 발견했다. 겸손하게 신변잡기일 뿐이라는 자신의 취향을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들이지' 라는 친구의 덕담이 코끝 시큰하게 다가왔다. 새삼 풍요로움이라는 삶의 미학을 느낄 수가 있어 좋았다.


https://brunch.co.kr/@hessemian/117#comment


사회에서 만난 지인 중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자주 스친다. '무항산은 무항심'이라는 맹자의 말씀을 가끔 거역하는 일탈을 보일 듯한 지인마저도 자나 깨나 생계를 위해 숨 가쁘다. 때로는 일상의 쉼표를 잠시라도 누리는 모습이 보고 싶은데, 먹고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요즘은 이 말이 왜 그리 짜증스럽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아파트 모기지론 부채와 취준생이 있고, 막내가 아직 학생인 철없는 나의 밥벌이 투정이지 싶다.


영업이란,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게 최고의 효율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왜 최대의 노력만을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최소의 노력에는 반드시 불법 변칙이라도 생긴다는 걸까?     


삶의 가치에 경제력을 무시하지 않는다. 돈이 행복의 최고는 아니지만 불행의 0순위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진부한 클리셰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여유로운 삶만을 꿈꾸고 풍요로운 삶을 훗날로만 미루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유로운 삶이 아닐지라도 작지만 스스로 풍요로운 삶은 가꿀 수 있으니 말이다. 대신 철없다는 소리는 들을 지언정 말이다.

혹시 아는가?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예쁘게 말을 건네는 친구가 곁에 있다는 사실에 새삼 행복에 겨울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쯤 신구와 강태기는 현실과는 다소 괴리가 있더라도 예전의 추억만큼은 공감하며 살아가겠지.


아제베의 일상에세이는

[딜레탕트 오디세이]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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