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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제베 Jun 25. 2021

상추의 계절

채소는 흙에서 자란다.

시골집 마당에 한껏 쏟아지는 뜨거운 햇살은 벌써 성하의 계절을 느끼게 한다. 처마 밑 그늘에 앉아 유유자적한 자유를 저 산 너머로 풀어 청량한 하늘과 솜사탕 구름송이를 마음껏 품어본다. 이보다 더 자유운 순간이 있을까? 새삼 평온을 실감하며 생각에 잠기는데 어머니의 부름이 들린다. 벌써 점심때가 되었나 보다.

               

마루에 걸터앉은 채 점심상을 마주한다. 아직 시장기가 느껴지지 앉지만 내가 밥을 먹어야 어머니도 밥을 기에 숟가락을 집는다. 김치찌개의 매움함이 식욕을 돋우는 듯 하지만 나의 왼손은 자연스레 상추로 가고 있다. 방금 따온 상추가 정갈스럽게 물기를 머금고 있다. 상추 두 장을 포개어 밥과 된장을 얹고 한입 넣어 우물거리는데, 상추의 아삭함과 된장의 짭짜름함이 맛의 침샘을 자극한다. 상추쌈이야말로 포만감 없이 점심 한 끼 채우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상추에는 밥을 풍성하게 올려야만 풍성한 복을 싼다고 하지만 밥이 많으면 상추의 맛이 감소한다.


마트의 과일 채소 코너를 지나다 보면 계절을 잊게 다. 심지어 겨울에도 딸기가 있다 보니 요즘 학생들은 딸기가 겨울 과일이라고 대답하는 경우도 있다. 상추도 이와 비슷하다. 나는 한때 상추는 여름 채소라고만 생각했다. 눈 내리는 겨울, 삼겹살 식당에서 상추를 곁들여 먹으면서도 의식을 못할 정도였는데, 상추는 이미 사계절 먹을 수 있는 채소가 되어 있었다.     




나는 식은 밥에 집된장을 얹어 먹는 여름 상추를 좋아한다. 그 계기는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인상 깊어서였다. 정비석의 소설 '성황당'을 영화화했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였다. 강원도 깊은 산골의 숯가마 옆 계곡에서 두 주인공인 정윤희와 이대근이 점심을 먹는 장면이 있었다. 꽁보리밥에 검은 된장을 얹어 먹는 장면에서 맛의 갬성이 느껴졌는데, 우걱우걱 상추쌈을 맛있게 먹는 정윤희의 모습이 나에겐 여름 상추를 좋아하게 된 장면으로 기억되었다.     


꽁보리밥에 된장 상추쌈을 맛있게 먹던 영화 장면



상추는 복을 싸 먹는 세시풍습으로 전해져 왔다. 빅맥처럼 여러 장의 상추에 밥을 그득 올려 먹는 것이 정통 쌈의 모습이다. 그래야만 풍성한 복이 찾아든다는 것인데 풍성한 복을 위해 풍성한 쌈을 먹으려면 입을 크게 벌려야 한다. 입뿐만이 아니라 눈동자까지도 커지게 된다. 그래서 옛 시어머니가 흠잡을 데 없는 며느리를 혼낼 때는 반드시 상추를 먹게 했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디 감히 시어머니 앞에서 눈을 크게 부라리냐며.     


상추 줄기 액즙을 직접 먹어보았지만 전혀 졸리지 않았다. 많은 양을 섭취하면 졸릴지도 모르겠지만.

상추를 먹으면 졸린다는 말이 있다. 상추의 줄기를 꺾어 보면 우윳빛의 액즙이 나오는데 이 액즙이 졸림을 유발하는 성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전혀 졸리지 않다. 요즘 상추는 하우스 재배가 많고 어린 상추가 많기에 우윳빛의 액즙이 안 나온다고 해서 줄기를 떼지 않고도 먹어 보았다. 하지만 역시 졸림 증세는 없었다.      


한의서에서는 ‘상추가 잠을 덜 자게 한다’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결국 상추는 수면제와 각성제의 중간에 있다고 보면 될 것도 같은데 졸림 증세는 아무래도 체질의 영향인 듯싶다.      


요즘 상추는 수생 재배로도 출하되고 있다. 공자는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건강의 기본은 제철 음식이라 하여 반드시 제철에 나오는 음식만을 먹었다는데, 제철을 차치하고라도 수생 채소가 재배된다고 하면 무슨 말이 나올까 궁금하다.      



미식가가 아닌 나로서는 제철 음식을 가려 먹지는 않는다. 편리에 의해서 먹는 편이다. 그러나 채소는 흙에서 자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1인이다. 음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편리가 정서를 덮을까 봐 은근히 문명의 이기가 두렵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텃밭의 상추가 유난히 싱그럽게 보인다. 


4월에 심었던 시골집 상추가 먹음직스럽다.


아제베의 일상에세이는

[딜레탕트 오디세이]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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