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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제베 Jun 29. 2021

노모의 설거지 뒷모습

노모의 자존감을 존중한다는 것

지난주에는 막내 여동생이 시골집에 머물렀다. 여동생이 서울로 돌아가고 3주 만에 마주한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노쇠한 기력이 확연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산술급수적이 아닌 기하급수적으로 진행되는 노화에 마음이 아리면서도 짜증이 났다.

      

‘밭일에 너무 과로한 것 같은데, 밭일은 어디까지나 취미로 소일하세요!‘

‘나 얼굴이 못 쓰겄냐?’     


늙어 보인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망설이는데 어머니는 자가진단의 변을 내린다.     

‘머리 파마할 때가 되어서 그런갑다.’

‘그럼, 내일 읍내 미용실에 갑시다.’

‘읍내는 싫고 광주 가면 단골집에서 할란다.’     


믹스커피를 좋아하고 명품까지는 아니어도 일류를 지향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다음날 광주로 모시고 왔다. 9시가 넘어 미용실에 간다더니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 돌아왔다. 반드시 원장에게만 머리를 맡기려는 어머니의 강한 의지 때문에 순서가 늦게 돌아온 것이다.     

‘이제 파마도 했고 너 안 바쁘면 시골집에 데려다주면 좋겄다만...’     


시골집에 인터넷과 팩스, 프린터를 갖춰놓았기에 긴급회의만 없다면 광주든 시골이든 일하는데 나야 상관이 없다. 하지만 며느리가 해주는 식사로 편히 쉬면서 영양보충이라도 해드리려는 생각에 일주일 정도 머무르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파트 공간을 무척이나 답답해하는 어머니의 생각은 어서 마당이 있는 시골집에 가기를 원한다.        

‘미용실 원장이 그러더라만 곧 장마가 온다든디 장마 준비도 해야 겄다.’     


아직도 나는 어머니의 결심을 이길 수 없다. 나이가 든다고 결심 앞에서 유순해진다는 보장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어머니를 보더라도 말이다. 나는 97세 어머니에게 강제하지 않는 것이 있다. 설거지와 하루 세끼 먹기(?)이다.     


박완서 소설가의 어느 산문에서 읽었던 기억이다. 작가의 모친이 90세까지 사셨는데, 마지막까지 모친의 고유 영역으로 간섭하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걸레질이었다고 한다. 모친의 걸레질 퀄리티가 작가의 눈에는 성에 차지 않았다. 하지만 모친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걸레질을 강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모친의 마지막 자존감을 존중해주는 마음이었다.     



나는 평소 아침을 잘 먹지 않는 편이다. 상쾌한 모닝샤워에 이은 모닝커피 한 잔이면 딱 좋은 출근 컨디션이 된다. 하루 일과를 계획하고, 거래처 컴플레인 체크 후 유지보수를 마치면 금방 정오가 된다. 컴플레인이 없는 날에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데 이 또한 금방 시간이 흐르기에 아침을 건너뛰어도 전혀 공복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시골집에서 어머니가 차린 세끼 밥을 먹지 않으면 사달이 난다. 어머니 인생에서 끼니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싶을 정도다. 아직 텃밭에서 계절 따라 각종 채소를 가꾸는 어머니의 힘은 곡기이다. 그런데도 내가 끼니를 거르면 어머니는 무언의 단식 투쟁을 하듯이 끼니를 거른다. 처음엔 짜증을 내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을 때는 한두 숟가락 깨작거리다 마는데, 이를 보는 어머니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제는 나의 ‘육체건강’이 아닌 어머니의 ‘마음건강’을 위해 억지로 아침을 먹는다. 나에겐 금식의 고통보다 더 힘든 아침식사가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내가 설거지를 하려고 하면 또 한 번 사달이 난다. 아직 설거지 못할 에미가 아니며, 나는 당신이 해준 세 끼를 맛있게 먹어주면 된다는 것이다. 그게 당신의 보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설거지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면 연민 아닌 인생무상이 느껴진다. 인생의 덧없음이 어머니의 뒷모습에 확연히 투영된다.      


어머니의 설거지 뒷모습에서 인생무상을 느낀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엄했다. 목소리도 크고 사나웠다. 선친에게 매를 맞아본 적은 없지만 어머니에게는 종종 매도 맞았다. 목공이었던 선친은 시골에서 평생 집 공사를 하다가 50대에 돌아가셨다. 집 공사를 하면 일용직 인부들의 식사와 설거지는 어머니가 도맡아 했다. 유년의 기억으로는 어머니의 설거지 모습은 씩씩했다. 커다란 고무다라에서 비누거품을 내고, 입에서는 ‘쎄~쎄~’ 소리를 내며 단숨에 해치웠던 기억이다.


이제는 목소리도 사납지 않고 손목의 힘도 없고 어깨도 내려앉았다. 입에서는 더 이상 예전의 ‘쎄~쎄~’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오직 자식을 위한 무념무상의 행동으로 여겨진다.      


시골집에서 만큼은 당신 손으로 직접 설거지를 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박완서 작가의 모친의 걸레질처럼 나도 어머니의 설거지를 당신의 자존감으로 존중한다. 하지만 내 마음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여인의 숙명과 늙어감이 뭔가 싶기도 하고.



오늘 선반을 낮게 만들어 컵을 올렸더니, 모친은 자신의 신념대로 양념통으로 재배치했다.


▶ 아제베의 일상에세이는

[딜레탕트 오디세이]에서 계속됩니다.



길고양이 네로는 신념 강한 어머니를 무서워한다. 배고픔 앞에서는 용기가 필요한 검은 고양이 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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