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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제베 Nov 01. 2021

감추고 싶은 진실, 다다익선

9시 업무 시작을 기다리며 그윽한 커피 향을 음미하는 데 문자 진동벨이 울린다. 월요일 아침이면 분주해지는 거래처 업무연락인가 보다. 그러나 지금 마시는 뜨거운 커피의 맛을 더 만끽하고 싶다. 9시에 대응하기로 하고 느긋하게 커피를 마신다.      


다시 진동벨이 울린다. 거래처 담당자의 월요일 회의 자료 요청 S.O.S 인가 싶어 마지못해 휴대폰을 연다. 거래처가 아닌 나와 아내의 은행 입금 알림 문자이다. 9시 이전의 은행 입금 알림은 흔치 않은 일이기에 고개 숙여 문자를 들여다본다. 군 공항 전투기 소음 배상금이다. 20여 년 군 공항 근처에 살면서 네 번째 받는 소액 배상금이다.     


전화 통화를 할 수 없을 만큼 소음에 시달릴 때는 게거품을 물고 이전을 촉구하지만 막상 배상금 앞에선...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경제학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나는 공짜에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불로소득 또한 달가워하지 않는다. 약간 다른 맥락이지만 선물도 마찬가지이다. 김영란法이 왜 필요한지조차도 이해가 안 가는 타입이다.


나의 샐러리맨 생활에서 딱 한 번 거래처 관련 ‘을의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12층 신사옥이 완성되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회사 분위기에 편승해서 직원용 PC를 수백 대 구입을 했을 때이다. 당시 전산실장이었던 나는 복수의 납품처에서 비교 견적을 받아 좌고우면 없이 업체 선정을 마쳤다.      


새 사옥에, 새 책상에, 새 PC를 설치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인 90년대 초였기에 일부에서는 PC의 역할이 고급 타자기에 불과하다는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전산 책임자로서 마음 뿌듯했다. PC 설치 하자기간이 끝나갈 무렵 납품처 대표가 전산실을 찾아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커피를 마시던 중에 납품처 대표가 자신의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선 무언의 눈빛을 보내며 작은 상자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크기로 보아 골프공이나 손톱깎기 세트 같은 기념품 정도의 선물로 보였다.      


퇴근 후, 작은 상자를 열어 본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당시에는 소유하고 있지 않았던 폴더형 휴대폰이 들어 있었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선 이것을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시작했다. 도덕적 판단의 고민이 아니었다. 나로서는 이런 상황이 너무 어색했던 것이다. 밤새 내 자신과 밀당을 했지만 결국엔 고맙다는 답례의 말로 선물을 수용했는데 지금 사용하는 휴대폰 번호의 시작이었다. 그 대표는 지금도 만나는 사이가 되었고.     


어렵게 찾은 당시의 전산실 근무 사진


언젠가부터 명절이나 선물 철이 다가오면 보이지 않는 무거운 그림자가 내 머리를 짓누른다. 마음의 게으름인데 그중 하나가 선물 주고받기이다. 선물 비용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내가 선물을 받으면 나도 언젠간 상대방에게 선물을 해야 한다는 귀차니즘이 나의 머리를 무겁게 해서다. Give & Take의 강박관념이다.     


그렇다고 선물의 미학을 몰라주는 건 아니다. 조금 슬프긴 했지만 O. 헨리의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은 어려서부터 마음속 깊이 각인된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선물이라는 것이 피부감 있게 와닿지 않았던 것은 선물도 일종의 습관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물이란, 인식의 습관이 아닌 성의와 배려의 습관이 되어야 하는 데 나는 인식의 습관에 갇혀 있다고 봐야 한다. 지금도 극복하지 못하는 습관 중의 하나이다.   


그건 그렇고 군 공항 소음 배상은 언제까지 인가? 이번엔 용돈 정도의 배상이었지만 배상금 전체를 따지면 제법 큰 비용일 것이다.      


소음 배상금은 엄밀히 공짜 돈도 아니고 불로소득도 아니다. 하지만 요즘처럼 매출이 부진할 때는 공짜 돈이든 불로소득이든 재난지원금 못지않게 반갑기 그지없다. 아내에게는 군 공항 옮기지 말고 매년 소음 배상을 받고 살자는 농담 문자까지 건넸다. 그래서 돈 앞에선 감추고 싶은 진실의 하나인 다다익선을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아제베의 일상에세이는

[딜레탕트 오디세이]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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