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 어둠은 도시의 어둠보다 빨리 찾아든다. 초저녁 뉴스를 볼 틈도 없이 어머니는 금세 잠이 든다. 조용히 불을 끄고 안방에서 나와 '나만의 방'인 뒷방으로 향한다.
간밤엔 두 권의 책을 읽었다. 하현 작가의 <어느 맑은 날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에 대하여>와 허희 평론가의 <희미한 희망의 나날들>이었다. 전자는 지인의 추천으로 후자는 라디오 청취 중에 알게 된 책이었다. 두 권을 완독하고서 잠을 청하러 뒷방을 나오니 새벽이 가까워졌고 안방의 어머니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TV를 켜놓고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강조했던 ‘자기만의 방’은 가부장제에 맞선 여성들의 목소리였다. 여성들의 창의성 발휘를 위해서는 얼마만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들에게 자기만의 방이 없다는 것은 꼭 경제력뿐이었을까? 가사노동도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가정적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성 불평등을 이야기할 때는 목소리가 작아지는 게 남자들의 양심이다. 아무리 유교적 시선이 강한 남자라도 여성들에게 용기와 습관을 갖자는 울프의 외침에는 수긍을 아니할 수가 없다.
자기만의 방은 반드시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남성에게도 때론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나 또한 ‘나만의 방’을 갖기 위해 시골집을 찾는다. 이럴 때는 아내를 동행하지 않는다. 나 홀로 시골집에 오면 광주에 남은 아내도 자연스럽게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나만의 방을 찾을 때는 언제일까.
나는 아내가 곁에 있을 때 독서를 한다거나 낮잠을 잔다거나 내 취향의 TV프로를 독점하지 않는다. 급한 컴플레인이 발생할 때 외에는 프로그래밍도 하지 않는다. 나만의 방을 생각할 때는 글을 쓰고 싶을 때이다.
시골집 나만의 방
요즘 써보고 싶은 글 중의 하나가 간호사의 이야기다. 35년 근속의 아내가 겪은 간호사의 에피소드뿐 만이 아니라 간호사 가족으로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는, 지인이나 친척들에게 받은 병원 관련 청탁 같은 이야기다. 청탁자들은 예약을 대신하고 치료 경과를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 모든 예약은 전산화되었고 개인 의료정보는 보다 강화되었기에 청탁을 받을 때 나는 많은 고민을 한다. 아무리 부부 사이지만 이런 청탁들은 아내에게 선뜻할 수가 없는 상황이 많다.
청탁뿐 만이 아니라 간호사라는 이미지에 대한 질문도 가끔 받는다. 언젠가 문학회 여성 문우에게 조차 하얀 유니폼의 19금 질문을 받을 때도 있었다. 아내는 자신의 이야기가 글의 소재가 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하지만 당나귀 귀를 외칠 대나무 밭이 필요할 때가 있다. 즉, 아내의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인데 이럴 땐 나만의 방에서 글을 쓰는 게 제격이다. 시골집이 아닌 광주에서는 아내가 잠이든 시각 글을 쓰기도 한다. 물론 퇴고 과정에서 모조리 잘려 나가지만 말이다.
시골집 작은 뒷방에 앉으면 외딴 오두막에 앉아 있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나는 이 고즈넉한 정취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데 ‘나만의 방’으로서 손색이 없다. 이곳에서 독서를 하고 글을 쓰고 혼술의 낭만을 만끽한다.
시골집 나만의 방을 찾는 일이 반드시 좋은 일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 편으로는 망설여지는 경우가 있다. 어머니를 시골에 두고 혼자만 올라올 때이다. 오늘도 어머니는 아침 일찍부터 분주하다. 텃밭의 채소를 캐고 바리바리 싸놓은 반찬거리들을 트렁크 뒤에 두고 대문도 활짝 열어 놓았다. 배웅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 어머니의 얼굴엔 온통 아쉬운 표정뿐이다.
‘조심히 가거라. 언제 또 올래?’
또 언제 올 거냐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가 난다. <나만의 방>의 존재가 잊히고 이조년의 시조인 <다정도 병인 양하야>가 생각날 따름이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야 잠 못 들어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