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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제베 May 29. 2022

시골집의 아침 서정

영화 ‘악마의 파가니니’ 니콜 쉐르징거의 <아리아>

시골집에서 맞이하는 휴일의 아침. 커피 믹스 한 잔을 들고 처마 밑 그늘에 앉는다. 맑은 하늘에 유유히 떠있는 구름 그리고 돌담을 수놓은 싱그러운 이파리들. 인간에게 평온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는 파랑, 하양, 초록의 색채이다. 초록의 잔디 위에 서서 파란 하늘을 향해 하얀 공의 티샷을 앞두고 있는 골프장 설렘의 색상이기도 하고.  


마을 산 어디선가 '꿩꿩'하는 꿩 소리가 들려온다. 아침부터 누구를 부르는 것일까. 시선은 그대로 허공에 드리운 채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돌담 너머의 작은 숲에서는 이름 모를 새들이 재잘대고 있다. 청아하고 정겨운 소리인데 무슨 새들일까. 휘파람 새는 아니겠지. 새소리에 더불어 휘파람 소리라도 내어보고 싶다. 하지만 나는 휘파람을 불지 못한다. 학창 시절 배우려 애써도 보았지만 득음은커녕 휘파람 소리마저도 제대로 내지 못한다.


휘파람을 이야기하니 떠오르는 한 사람. 현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다. 그는 십 여곡의 교향곡을 휘파람으로도 부를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음악 가족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겠지만, 휘파람 소리를 잘 낼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부러웁기 그지없다. 부러움은 부러움으로 그쳐야만 할까? 아쉽긴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말하지 말라’고 했던 그의 말처럼 부를 수 없는 것에 대해선 부르지 말아야  할까 보다. 대신 아름다운 소리를 감상할 수는 있으니까.     




먼 산을 보며 한참 동안 새소리에 잠긴다. 간헐적인 꿩 소리엔 옷매무새를 가다듬듯이 마음을 가다듬지만 나의 의식은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얼마나 흘렀을까, 믹스커피의 마지막 한 모금이 머그컵 바닥에 차갑게 얼룩져 있다. 대문 밖 텃밭에 앉아 무언가 다듬고 있는 노모를 보노라니, 마당에 심어진 봄 상추에 물이라도 뿌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움직이기가 싫다. 휴식의 나태를 즐기는 마음의 관성 이리라.


휴대폰을 들어 유튜브에서 음악을 찾는다. 오펜바흐의 곡인 자클린의 눈물이 첫눈에 들어오지만 첼리스트 자클린을 생각하면 아침 서정에는 다소 무거운 멜로디이다. 분위기상 skip를 하고 검색을 계속한다. 다음으로는 영화 ‘악마의 파가니니’에서 니콜 쉐르징거가 불렀던 아리아의 영상이 눈에 띈다.     


몇 해 전, 영화 ‘악마의 파가니니’ 개봉 첫날. 나는 서라운드 입체음향에 실린 니콜 쉐르징거의 천상의 목소리에 나의 영혼을 빼앗겨 버렸다. 조조영화가 끝나고도 니콜 쉐르징거의 아리아가 하루 종일 머릿속에 맴돌아, 그날 밤 심야 마지막 상영프로를 다시 보는 상황이 발생했다. 같은 영화를 하루에 두 번 감상했으니 내 영화 습관으로는 예외의 날이기도 했다. 데이비드 가렛의 연주와 아리아의 가사 또한 잊히지 않는 영화였기에 시골집 아침 마당에 앉아 감상에 젖는다.      


“나 그대만 생각해, 내 사랑

넘실대는 바닷물에

태양빛이 눈부실 때


나 그대만 생각해, 내 사랑

고요한 호숫가에

달빛이 은은할 때

......

길 먼지만 일어도

그대 모습 아른거려

길가는 저 나그네

혹시 그대는 아닐까.

......

오, 내 사랑.”  

    

이어폰을 꽂고 신작로에라도 나가봐야 할 것 같다. 비록 길 먼지가 일지 않는 아스팔트 길이지만 그대의 모습이 아른거릴지도 모르니까.  


아제베의 일상에세이는

[딜레탕트 오디세이]에서 계속됩니다.



영화 ‘악마의 파가니니’에서

https://youtu.be/UOKKvmYx_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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