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제사를 마치고 호남고속도로 순천 톨게이트에 들어선다. 얼마 만일까. 기억을 헤아려보니 팬데믹 한 해 전에 오고 이번에 왔으니 삼 년 만인 것 같다. 톨게이트를 지나 고속도로에 들어선다. 호남-남해 고속도로라고 불리는 고속도로이다. 편의에 의해 순천 IC를 기점으로 서울방향은 호남고속도로, 부산방향으로는 남해고속도로라고 부른다.
한때는 출퇴근하듯이 호남고속도로를 달렸지만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추억으로 묻어버리기에는 다소 아쉬운 지난날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투자와 창업 그리고 이성의 설렘을 갖게 했던 기억까지.
첫 개발 의뢰 업체의 첫 전산 미팅 메모(2000년)
구글 지도가 정식 출시되기 전인 2000년. 도쿄에서 2년 간의 Y2K(2000년 대응) 프로젝트를 마치고 벤처 열풍을 쫓아 광주로 돌아왔다. 나는 투자자 겸 직원으로 옛 직장 동료의 옐로페이지(yellow page) 사업에 동참했다. 지도 기반의 옐로페이지 사업이 본캐였지만 부캐인 건설 프로그램 패키지 개발도 함께 진행을 했다. 첫 번째 개발 의뢰 회사가 순천에 있었기에 업무 분석차 광주-순천을 2~3개월 왕복을 했다.
벤처 열풍은 우리에게까지 오지 않았다. 호남고속도로를 달리며 떠오르는 상념 중에 가장 쓰라린 기억이다. 그럴 때는 씁쓰레한 기억을 떨치고자 음악을 틀고서 운전을 한다. 하지만 석곡 IC를 지날 때는 이성을 흠모했던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도 한다.
고딩시절. 여고 동창이었던 작은 누나 친구가 있었다. 석곡 IC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던 누나 친구는 계란형 얼굴에 단정하게 뒤로 묶은 생머리가 매력이었다. 둥근 넥라인의 체크무늬 셔츠가 어울렸던 매혹의 패션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언제 보아도 청결한 이미지는 나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기에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면 나 홀로 설렘 가득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 석곡 IC를 지날 때마다 사춘기의 셀렘이 되살아나 그 누나의 안부가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누나와 결혼한 누군가는 행복하겠지, 라며 부군이 된 그 누군가를 질투하기도 했다. 그럴 즈음 작은 누나를 통해 우연한 소식을 들었다. 그리움과 질투의 마음으로 전해 들은 소식은 나의 예상과는 달리 새드 엔딩이었다. 막상 이혼 소식을 듣는 순간에는 안타까워했지만 마음 한구석엔 안도하는 묘한 양가감정이 느껴졌다.
안도하는 마음이란 무엇이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누나 친구가 아닌 동생의 친구였다면 사랑의 마음을 지녔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일 것이다. 왜 그때는 미리, 연상의 여인은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으로 단정했을까. 지금의 세대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통행량이 적은 직선행 도로에 들어선다. 오른손으로 텀블러를 집어 든다. 마음을 달래려 뜨거운 커피를 마셔보지만 진한 아쉬움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더 이상의 감정은 불필요하기에 애써 마음을 짓눌러 운전대를 잡은 손목에 힘을 가한다.
나는 고속도로에서 운전대를 잡을 때, 앞서 이야기했던 두 가지 생각에만 빠지지 않으면 잡념이 거의 없어진다. 멍때리기 수준이다. 안전운행을 위한 신경 외에는 모든 잡념이 소멸된다. 대신 가끔 공상을 한다. 그러다 보니 가끔 속도위반 딱지를 떼인다.
호남고속도로 광주-순천 구간에는 두 군데의 큰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 오르막을 염두에 두고 과속을 시작하는 곳에 단속용 카메라가 있다. 이곳에서 세 번이나 속도위반 딱지를 떼였다. (나는 140Km/h를 즐기는 보~통의 미니 스피드광(?)이다.)
첫 번째 속도위반을 했던 씁쓰레한 곳을 어찌 잊겠는가. 두 번째 이곳을 지나게 되었을 때부터는 내비게이션의 경고 안내가 나오기 전부터 경계를 시작한다. 그러나 정작 단속카메라 단속 라인에 들어서는 순간 새로운 공상에 빠져 속도계를 뻔히 보고도 딱지를 떼이고 말았다. 세 번째 이곳을 지나게 되었을 때는 공상을 멈추고 서서히 속도를 줄이려는 데, 휴대폰 벨이 울리는 바람에 또 딱지를 떼이고 말았다. 오늘은 공상을 하거나 휴대폰이 울리더라도 속도위반 딱지를 떼이지 않도록 아예 90Km/h 원천 봉쇄 속도로 이곳을 통과한다. 이번엔 무사통과다.
예나 지금이나 광주(동광주) 톨게이트에 다다르면 광주가 그리 반가울 수가 없다.
저멀리 광주 톨게이트가 시야에 들어온다.
중딩 시절. 작은 누나의 여고 입학에 따라 나는 어부지리로 광주 전학을 왔다. 방학이 되면 지금의 우주센터가 있는 나로도로 내려가 부모님과 지냈다. 방학이 끝나고 광주로 돌아올 때는 고흥-벌교-화순-광주를 거치는 교통편과 여수-순천-광주를 거치는 교통편이 있었는데, 나는 호남고속도로를 달리는 교통편을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면 모처럼 두둑해진 용돈으로 간식을 사 먹을 수 있는 고속도로 휴게소가 좋았었다. 나름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마음이 충만했었던 같다. 하지만 휴게소의 간식 타임이 끝나면 차멀미에 시달리는 고통도 함께 했다. 그랬기에 광주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에 들어서면, 광주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친구를 만나는 정겨움이었다.
그런 정겨움이 있어서였을까. 부모를 떠나서도 타향의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자주 연탄불이 꺼지고 간장에 밥을 비벼먹던 자취 생활에도 만족했으며, 지금 생각하면 중딩 시절에 가장 열심히 공부를 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능력의 한계를 인정해야 했고, 최종 결승선까지 학구파의 학습 유지를 못 했던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는다. 공부로 성공하고 싶었던 그때의 꿈은 이생망이 되었지만 다음 생에서라도 이루고 싶다. 돌이켜 보면 나에게는 공부처럼 멋진 게 없었던 것 같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