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제베 Dec 29. 2022

혼놀의 평온함 - 혼술(1)

세밑의 광주에 눈이 내렸다. 첫날엔 제법 눈다운 눈이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날에는 폭설로 이어졌다. 눈의 낭만은 사라졌다. 비의 낭만은 비 오는 분위기와 비 갠 날의 상쾌함이 있기에 일석이조이지만, 눈의 낭만은 눈이 그치면 겪게 되는 결빙과 질퍽함에는 이해타산이 섞이게 된다.           


살갗을 에는 추위 속에 자의 반 타의 반 외출이 통제되었다. 재택근무 특성상 하루 한 번 바깥공기를 마셔야 할 저녁 산책의 즐거움이 사라졌다. 대신 지하 주차장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을 벌였다. 할인 마트에 다녀오는 동안에는 양손에 들린 식료품 무게로 낑낑거리기도 했고.      


지하 주차장도 선점했고 주말에 일용할 식품도 냉장고에 차곡히 넣고 나니 든든한 여유가 생겼다. 베란다에 서서 뜨거운 유자차를 후룩후룩 마시며 눈으로 뒤덮인 백색 풍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톨스토이였다면 시베리아 빙하의 설원에서 보드카를 마시면서 손을 호호 불어가며 작품을 썼을 것이다.


한잔의 술이 생각났다. 고흐의 밀밭 그림만 보아도 술에 취하는 아내에게 술의 미학은 통하지 않기에 시나브로 혼술의 분위기가 되었다.     





청춘시절 부러운 것 중의 하나가 친구들과 당구장에 갈 때 여친과 함께 가는 거였다. 나는 친구들과 당구를 치고 여친은 당구장에서 제공하는 음료수를 마시며 고즈넉하게(?) 나를 기다려 주는 것. 당구가 끝나면 여친과 맥주잔을 기울이며 주인을 버리고 가을 속으로 떠난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리는 신파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결론은? 당구비와 맥주를 마실 술값이 없었다. 그 시절은 최민석 작가의 에세이 제목처럼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였다. 패배의식에 젖어 사는 루저에게 여친이 생길 리 없었다. 의 젊음은 그렇게 흘러가버렸지만 내 청춘에 이루지 못한 여친과의 낭만을 대신할 아내에게 동행 의사를 타진했다. 술집 동행에는 항시 아내의 표정을 살필 수밖에 없다. 백석의 詩를 읊조리며 분위기를 조성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잠시 후, 파카를 걸친 아내가 외출을 준비했다. 삶의 끈을 놓은 듯한 고뇌에 찬 나의 표정 연기에 속아 나의 곁을 따르고 있었다. 뻔한 연기에 알고도 속아 주었겠지만.


맥주 마니아인 나로서는 맥주 외에 다른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처럼의 폭설에는 추위를 이길만한 독한 술이 생각난다. 마신 적도 없는 압생트가 떠오른다. 압생트라는 이미지에 빠져들 때면 시인 랭보의 한 마디에 취해서 한 번쯤 마셔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위스키보다는 압생트가 더 어울릴 것 만 같은 랭보는 ‘푸른빛 압생트가 선사하는 취기야말로 가장 우아하고 하늘하늘한 옷’이라고도 했기 때문이다.      




아내와 함께 꼬치구이집에 들어섰다. 생맥주와 꼬치구이를 주문하고 아내를 위해 어묵탕도 시켰다. 먼저 꼬치구이와 생맥주가 나왔다. 거품 가득한 생맥주를 한숨에 들이킨다. 주당의 신세계가 펼쳐지는 듯한 팡파르가 목구멍을 타고 든다. 아내는 맥주대신 안주를 먹으며 앉아 있지만 혼술이나 다름없다. 다시 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읊조린다.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고 더러워 버린다는 것이 혼놀을 응원한다.  눈 오는 날, 혼놀 혼술에 어울리는 멋진 시가 아닐 수 없다.


아제베의 일상에세이는

[딜레탕트 오디세이]에서 계속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혼놀의 평온함 - 생산적 활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