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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제베 Aug 10. 2023

혼놀의 평온함 - 개인주의

나의 개인주의는 언제부터였을까.

태풍 카눈의 위세에 항공편과 배편이 고립되고 있다. 나 또한 외출 계획을 취소하고 갈 곳 잃은 나그네처럼 태풍을 관망하고 있다. 평소의 비의 풍경이라면 잔잔한 감성에 젖을 것이지만 지금은 태풍의 경로만을 지켜볼 따름이다. 나 홀로 묵언 수행을 하듯이 비 오는 창 밖을 내다본다. 문득 혼자라는 사실에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사람과의 만남이 줄어든다. 유교적 상하관계에서 대등한 수평관계로 변해만 간다. 전통주의의 습성들은 퇴색되고 개인주의의 익숙함으로 길들여져 간다고 할 수 있겠다. 만인주의에서 개인주의로의 인식이 싹트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학자들의 견해로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아포리즘이 생겨난 시점부터 라고 한다. 자아의 인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속된 말로 머리가 크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겠다. 어느 시기를 무 자르듯이 구획할 수는 없지만 내 역사 상식으로 비춰보았을 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나의 경우는 언제부터 개인주의 인식을 감지했을까. IMF 풍파를 맞이하고부터였던 것 같다. 정리해고니, 희망퇴직이니, 정년백수니 하는 듣보잡의 단어들에서 미래의 불안을 지니게 된 것이다. 낙천주의를 낙관주의로 부정하게 되는 분위기에서 나의 미래는 진보하지 못했다. 심적, 물적 코스트를 줄이기 위해 자연이 홀로 뛰는 경우가 많아졌다. 선빵보다는 안전빵으로 리스크 관리를 하였던 셈이다. 나의 개인주의는 자아의 실현이 아닌 자아의 의기소침이 가져다준 씁쓸한 과정이었다.   


‘젊어서 진보가 아니면 가슴이 없는 것이고, 나이 들어서 보수가 아니면 머리가 없는 것’이라고 칼 포퍼는 말했다. 나의 자아는 가슴에서 머리로 전이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라고 외치고 싶다. 나의 외침은 진보도 보수도 나이에 상관없이 ‘그때그때 달라요’이다. 잔머리는 굴리지만 갬성을 잃고 싶지 않다는 항변이다. 즉, 하이브리드 철학을 유지하는 것이 나의 개인주의이다. 


개인주의에는 이타심보다 이기심의 무늬가 강하다. 감추고 싶은 진실의 무늬다. 이를 상쇄하는 건 이기적 무례함을 없애는 것이다. 올 한 해도 싸우지 않고 주변과 잘 어울려 살기를 소망해 본다. 세상이 미워질 때는 '사람도 하늘도 원망할 일이 못 되어 해마다 해가 저물면 나 혼자 슬퍼했다'는 김삿갓의 '회향자탄'을 읊조리며 마음을 위로하면서 말이다.


아제베의 일상에세이는

[딜레탕트 오디세이]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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