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만에 시골집 마당에 들어선다. 텅 빈 고요가 마음을 감싼다. 평온함의 고요다. 넉넉해진 마음으로 마당의 뒤꼍과 텃밭을 한 바퀴 둘러본다. 텃밭엔 어머니를 대신해서 요즘엔 시골 누나가 틈틈이 작물을 재배한다. 하지만 텃밭을 본다 한들 무슨 작물인지, 제대로 자라고 있는지 어떤지도 모른다. 갈증을 느끼는 텃밭에 늘어진 고무호스로 물을 뿌리는 정도이다. 화단에 올라서서 아랫집 마당을 내려다본다. 아랫집 텃밭엔 비료가 가득하다. 소일 삼아 가꾸는 텃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비료값만 해도 제법 나올 것 같은데 문득 채산성이 궁금하다.
언제나처럼 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을 바라본다. 백색 소음하나 없는 조용한 마을에서는 고독이라는 단어조차도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다. 뒷방 서재로 향한다. 한 달 만에 들어서는 서재에 먼지 쌓인 LP 레코드가 눈에 띈다. 젊은 날에 감상했던 음악 레코드들이다. 한때 까마득히 잊혔던 LP 레코드였는데, 어머니가 어떻게 보관을 하고 있었다. 너무 소중하게 보관하느라 그랬는지 박스 테이프로 단단히 묶여 휘어지기까지 했다. 지금 오디오의 턴테이블에 올려놓는다면 LP 레코드가 제대로 돌아갈지 의문이다.
모처럼 LP 레코드를 펼쳐보니 나의 20대 음악 취향이 그대로 나타나는 듯하다. 7080 대중가요를 무척 좋아했던 시기였다. 한 장 한 장 세월의 냄새를 맡으며 젊은 날을 회상한다.
20대에는 경쾌한 리듬이 좋았다. 30대에는 발라드풍의 리듬이 좋았고, 40대 이후부터는 클래식이 좋았다. 대중가요를 들을 때면 리듬 못지않게 노래 가사에 관심 많다. 특히 노래 제목에 관심이 간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무언의 감정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 감정을 졸저 <마이너리그에도 커피 향은 흐른다>에서는 다음처럼 표현했다.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서러움이 물씬 풍기는 안타까운 제목이다. 사랑에는, 야누스적인 달콤함과 쓴맛을 지닌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다. 사랑이란, 지고지순한 아름다운 마음의 교류이다. 하지만 사랑을 위하여 물질적 정신적 희생을 바치는 사랑과 목숨까지 바치는 열정적 사랑도 있다. 이처럼 뜨거웠던 사랑도 영원하지 못한 채 언젠가는 홀로 사라지는 그 쓸쓸함에 잠겨있지 않던가.
그 쓸쓸함을 달래기 위한 음악으로는 "마음은 집시(il cuore e uno zingaro)"라는 곡을 듣는다.
산다는 건, 시간적 공간 속에 사는 한 순간의 방랑자가 아니던가. 인간의 고독이란, 잠시 뜬구름 일어 스러지는 듯한 집착의 마음이 아니던가. 이 음악을 들으면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떠도는 집시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 좋다. 큰 욕심이 없는 유유자적한 여유로움을 갖게 해주는 음악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살아온 과거형을 느끼게 하는 제목이 있다. 최인호 소설가가 가사를 쓴 영화 주제곡인 "어제 내린 비(OST)"이다.
비가 오는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이 음악을 들으면 지난 세월의 발자취를 느껴볼 수 있어 좋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유리창에 흩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즐거웠던 일, 슬펐던 일들을 비에 젖어 흐르는 안갯속에서 회상해 보고, 어제의 시간 속에 맞이했던 순간들이 지금 이 순간에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아하는 노래다.
내가 살아갈 미래형을 느끼게 하는 제목도 있다. 주로 가을에 듣게 되는 "날이 갈수록"이다.
머무를 수 없는 시간 속에 꽃은 피고 지고, 세월이 가고, 젊음이 가버렸다. 깊어 가는 가을 속의 낙엽처럼 나의 세월은 속절없이 쌓이어만 간다. 더 낙엽이 쌓이기 전, 훗날을 위한 부드럽고 반듯한 길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목표가 만들어진다. 그런 예정된 시간 약속들에 대해서 날이 갈수록을 부르며 청사진을 만들어 보는 즐거움도 있다.
내가 살아가는 이 순간에 좋아하는 제목의 현재형은 뭐니 뭐니 해도 "죽도록 사랑해서(sinno me more)" 일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 이것보다 더 신나는 일이 있을까.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있을까. 사람을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 사노라면 느끼게 되는 삶의 목표 중의 하나가 아닐까. 이런 사랑을 나는 미치도록 많이 하고 싶다. 그것도 <죽도록 사랑해서> 말이다.
시골집에는 진공관 미니 오디오가 있다. 진공관 오디오 마니아인 동서 형님에게 물려받은 오디오이다. 진공관의 특성상 험노이스가 있어 디지털 방식보다는 소리의 맑음은 덜 하지만, 아날로그 특성상 원음에 가까운 부드러운 음질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저음에서의 음질은 진공관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큰 매력이다. 그런데, 진공관 튜브(러시아제 EL34, 12 AX7)가 고장나는 바람에 최근엔 감상을 못하고 있다. 대신 진공관 불빛만을 켜놓은 채 분위기 용도로 가끔 이용을 한다. 형님이 알면 아주 서운해할 것이다.
요즘은 트롯트 열풍이 대세인 듯하다. 하지만 음악은 순간순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마력이 있다. 때로는 대중가요가, 때로는 국악이, 때로는 클래식이, 때로는 재즈가... 오늘은 어떤 음악을 들어 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