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모처럼 네온사인이 부조된 종로 길을 걸었다. 널찍한 보도블록이 특징인 종로의 인도에는 예나 지금이나 청춘의 활력이 넘쳤다. 청춘의 틈바구니 사이와 낡은 필름 속으로 내 청춘의 실루엣과 함께 종로거리를 거닐었다.
나는 20대 시절, 鐘路에서 6개월의 취준생 시절을 보냈다. IT프로그래머로 취업을 하기 위한 전산학원을 수강했다. 불확실성의 절망과 궁핍의 일상이었지만 미래의 희망을 키웠던 곳이었다. 처음 시작하는 서울 생활에서 말씨가 낯설고 종로의 도회적 풍경이 낯선 이방인에게는 에뜨랑제의 낯섦을 느끼게 했다.
교통비와 식대를 제외하고 나면 공식적인 용돈이 0원이던 시절이었다. ‘움직이면 현금’이라는 종로거리를 애써 외면했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분식집에서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컴퓨터 실습실에 파묻혀 오후를 버텼다. 오직 취업을 향한 금욕적인 수도승의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한 달이 못되어 파계를 하고 말았다.
카뮈의 뫼르소를 유혹했던 강렬한 태양광선처럼, 종로의 유혹적인 저녁 불빛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저 허황한 거리로만 여겼던 '종로거리'에 내 마음은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경성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처럼 저녁시간이 되면 나 홀로 종로거리를 누비다 숙소로 돌아갔다. 궁하면 통한다고 지갑은 비었어도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요령도 터득했다.
종로에는 한국 YMCA의 정신적 지주로 불리는 전택부 명예총무가 계셨던 YMCA가 있었다. 그곳에서 무료 프로그램을 찾아 저녁시간이면 16mm 문화영화를 감상하거나 인문학 강의를 들었다. 건너편 종로서적에서는 잡지와 신간의 무료 북서핑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양심상 본문까지는 많이(?) 읽지 못하고 프롤로그와 목차만을 주로 읽었지만 문학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느낄 수가 있었다.
양탄자가 깔린 종로의 고급스러운 당구장은 나를 유혹했다. 당구장은 나의 일상에 포함시킬 수 없었지만 이것도 요령이 생겼다. 동료 취준생들을 따라가 당구알이 당구대 바깥으로 튀도록 교묘히(?) ‘픽사리’를 몇 번 내고 나면, 나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시합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대신 스코어 관리 역할인 판돌이로 바뀌어 서비스로 나오는 커피나 음료를 마음껏 마실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자본주의의 엄한 현실은 나로 하여금 안면몰수 철면피의 요령을 터득하게 한 것이었다.
학원수료를 마치고 얼마 후 조그마한 백화점 전산실에서 사회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몇 년 후, 우리나라는 88 서울올림픽의 열기가 시작되었다. 88 서울올림픽의 열기가 식어가던 다음 해, 나는 또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직장을 옮긴 것이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종로거리는 나에게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나름의 추억이 서린 청춘의 종로였다. 일본 또한 우리나라 정서상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지만 ‘나의 열정 나의 고독 절망에 묻고서’ 애증의 열정을 마음껏 펼쳤던 도쿄도 나에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이래서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