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쟝아제베도 May 28. 2019

솔직한 글만이 신선한 글일까?

누비처네 <나의 수필> 목성균

지난달 4월부터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되었다. 두 번째 수필집 출간을 위한 사전 작업이기도 하다. 첫 번째 수필집은 지난 시절의 일기장에 가까운 내용이었기에 글의 구성이나 주제에 대해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두 번째 수필집은 지금 살아가는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그동안 SNS에 메모한 글을 수필형식으로 윤문하여 게재하다 보니 수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새삼스럽게 수필 작법이나 아름다운 문장을 위한 작법 책을 다시금 펼쳐 보기도 했다. 대동소이한 여러 작법 책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이 있다. 글이란, ‘솔직하고 신선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런 말 자체야말로 전혀 신선하지 않다. 그리고 솔직한 글이 곧 신선한 글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참으로 진부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굳이 수필이 ‘내 이야기를 붓 가는 대로 솔직하게 쓴 글’이라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내 손자의 일기보다 더 진솔한 글은 없을 것이다. 

누비처네 <나의 수필> 목성균


솔직한 글과 신선한 글은 별개다. 수필이란 자신의 체험을 문학으로 표현하는 것인데, 한 사람의 일대기에서 소설처럼 드라마틱한 일이 과연 몇 번이나 일어나겠는가. 그렇다고 허위로 자신의 체험을 드라마틱하게 꾸밀 수도 없지 않은가. 반복되는 일상에서 자신이든 타인이든, 직접이든 간접이든 다양한 경험이지만 모두가 비슷하게 겪고 산다. 일상의 범주는 크게 신선하고 새로울 것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신선한 글만이 글이라는 선입견 내지는 주눅을 가지는 것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이것은 수필가 스스로의 문학적 노력을 차치하고서도 시, 소설 문학 장르에 비해 베스트셀러가 적은 수필문학의 한계다. 이 한계를 조금이라도 극복하기 위해서 나는 '허위가 아닌 허구'가 가미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수필을 위한 약간의 거짓말은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약간의 거짓말이 어느 정도를 이르는 말이냐? 글쎄 그게 문제입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그리 생각합니다. 솔직히란 말은 양심에 비춰서라는 말이니까 양심에 가책을 안 느끼는 정도의 거짓말은 해도 되지 않느냐는 생각입니다. 나를 위한 거짓말이 아니고 수필을 위한 거짓말은 해도 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누비처네 <나의 수필> 목성균


공감되는 말이다. 여기서 ‘거짓말’이란 자신과 남을 속여 피해를 주는 허위가 아니라 허구를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잠결에 번개 치는 것은 못 보고 천둥소리만 들리는 상황을 ‘번개가 번뜩이며 천둥이 우르릉거린다.’라고 글로 썼다고 하자. 천둥 이전에 반드시 번개가 쳤을 것이니, 번개는 직접 못 보았지만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수필에서 허구란, 팩트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상상의 허구'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다. ‘간결성’이다. 모든 작법에서 정직과 신선함 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말이다. 간결성을 위해 수필에서는 형용사, 부사 표현을 자제하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번개가 번뜩이며 천둥이 우르릉거린다.’ 를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린다.’ 로 퇴고한다. 전자보다 후자가 가독성이 좋기는 하다. 하지만 간결성만  따르다 보면 글은 또 수돗물처럼 밋밋해지고 만다. 글쓰기의 어려움이다. 


신선함, 정직성, 간결성 그리고 유익과 재미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다만, 멋있고 실용적이며, 편하면서 질이 좋고, 값이 싼 교복의 광고처럼 영혼 없는 이야기로 들리는 게 공허하다.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을 주저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래도 조정래 소설가의 한 마디가 위로를 준다.

문학은 상투성과의 싸움이다.

아제베의 문학이야기는

[딜레탕트 오디세이]에서 계속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왜 그리 어른이 되고 싶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