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자취를 통해 몸으로 깨닫은 가난의 모습
"아빠, 너무 추워서 그러는데 저 이사하면 안 돼요?"
대학교 1학년 생활을 거의 마치고 찾아온 겨울. 이불을 꽁꽁 싸맨 나는 전화기를 붙들고 아빠에게 말했다. 전화기 건너편의 아빠는 난감하셨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입을 여셨다.
"입대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조금만 참고 사는 게 낫지 않겠냐?"
별 의미 없는 대화가 몇 번 더 오간 후 전화는 끊겼고,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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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앞둔 나는 기숙사에 들어갈 성적은 아니었기에 자취를 해야만 했다. 내 인생 첫 자취였기에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다만 당시 우리 집안은 금전적으로 매우 어려웠기에 최대한 저렴한 집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 홀로 타 지역으로 이동해 이 집, 저 집을 둘러보는 일은 낯설고 두려운 일이었다. 발품을 팔아 몇 군데를 돌아본 후, 선택한 곳은 부엌도 없고 해도 잘 들지 않는 아주 작은 원룸이었다.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22만 원.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방에 대한 내용과 금액을 이야기했다. 아빠도 이런 것엔 익숙지 않으셨는지 오히려 내게 괜찮냐며, 그 가격이 맞는 거냐 물으셨다. 나는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탐탁지 않은 대화가 몇 번 오간 후 아빠는 집주인에게 계약금을 입금했다. 나는 홀로 본가로 다시 돌아왔다.
입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친구 녀석 집에서 밥을 먹게 됐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집을 구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친구 어머님이 갑자기 그 집 너무 별로라며 다시 알아보자고 말씀하셨다. 처음엔 부담이 되어 괜찮다고 답했다. 그런데 아니라며 괜찮으면 지금 한 번 가보자고 강하게 말씀하셨고 어느새 나는 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학교 주변 주택가에서 방을 얻어 자취를 한 적이 있었고, 내심 22만 원이라는 돈이 너무 크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기대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내가 계약한 방을 본 친구 어머니는 이거 당장 환불해야 한다고 말했고, 주인아저씨는 이제 와서 그러면 안 된다며 성을 내셨다. 하지만 친구 어머니는 강성이셨다. 주인아저씨는 곤란해하시면서 계약금을 돌려주셨고, 이후 친구 어머니와 함께 학교에 조금 벗어나 있는 집들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세상엔 참 다양한 집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방의 상태는 좋다고 할 게 못 됐지만 달에 5만 원~20만 원 이하의 집들이 많았다. 그중 어떤 할머니가 사시는 주택의 2층 집(1층 집 위에 가건물을 대충 세워놓고 세를 받았다.)을 보게 된다. 문을 열면 부엌과 욕실(?)이 함께 있고, 미닫이문을 열면 널찍한 방이 있는 집이었다. TV 드라마에서 조금 가난한 달동네에 있는 집 같은 느낌이었달까? 욕실과 부엌이 같이 있고 1층에 공용화장실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미닫이문을 열면 큰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마음에 들었다. 햇살은 널찍한 방을 따스하게 비췄고, 책상과 식탁들을 잘만 배치한다면 꽤나 그럴싸할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걸어서 학교와 20분 이상이 걸린다는 점, 화장실이 따로 있다는 점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내게 친구 어머니는 방이 참 괜찮다며, 가격도 보증금 10만에 월 10만 원이니 이 집으로 하라고 추천했다. 이전 집의 절반이라니... 힘들게 일하시는 우리 아빠의 주머니 사정을 절반에 가깝게 줄여줄 수 있다는 점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보증금 10만 원과 월세 10만 원을 주고 바로 계약을 했다. 그렇게 나의 자취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년 후 찾아온 겨울방학.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동시에 왜 사람들이 '좋은 집'에 살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었다.
이 집은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중 커다란 세 가지만 굳이 말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학교와의 거리였다.
초, 중, 고등학교와 달리 대학교는 한 번 등교하면 하교할 때까지 계속 머무르는 곳이 아니었다. 공강시간이 존재했기에 중간중간에 물건을 가지러 와야 할 때도 있고, 휴식이 필요해 집에 가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잠깐 다녀오기에 우리 집은 너무나도 멀었고, 친구들이 잠깐 집에 다녀올 동안 나는 계속해서 과실이나 도서관을 전전해야만 했다. 술자리라도 있는 날이면 한참을 걸어야 집에 도착했기에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두 번째, 위생이었다.
입주를 하고 물을 트니 녹물이 나왔다. 한참 후에야 깨끗한(?) 물이 나오긴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연히 주방도 깨끗할 리 없었고, 화장실도 마찬가지였다. 위생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고 살아온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살기 싫은 곳이다.
세 번째, 추위였다.
그곳엔 에어컨이 없었다. 그래서 여름엔 땀을 뻘뻘 흘리며 녹초가 되곤 했다. 그래도 저녁이면 약간 선선해져 선풍기와 함께라면 잠을 못 이룰 정도는 아니었다. 낮에는 도서관이나 과실에서 에어컨을 빵빵 틀면 됐기에 여름은 별다른 생각 없이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추위는 달랐다. 햇살이 쏟아져 마음에 들었던 큰 창에서는 구멍이 뻥뻥 뚫린것마냥 외풍이 불어왔고, 널찍해서 마음에 들었던 방은 채운지 얼마 되지 않은 기름을 순식간에 연소시켰다. 그마저도 거의 없다시피 한 단열재 탓에 아래만 따뜻하고 공기는 차디찬 지옥 같은 상황이 계속됐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어찌어찌 참을 수 있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세 번째는 아니었다. 본가에 살 때도 원체 몸이 약한 탓에 살짝 한기만 느껴도 감기에 걸리곤 했는데, 여기는 그에 비할 게 아니었다. 추위 탓에 거의 잠을 자지 못했고 저녁이 오는 게 무서울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참다 참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게 됐고, 서두의 대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돌아온 대답은 "버텨라."
지금 돌아보면 아버지의 입장도 이해가 간다. 곧 군대를 갈 녀석이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집을 옮긴다고 한다. 금전적인 손해와 함께 본인이 시간을 내어 한 번 더 아들이 있는 곳으로 다녀와야 한다니 얼마나 번거롭게 느껴지셨겠는가?
하지만 당시의 나는 아버지의 말이 너무나 서운하게 느껴졌다. 자식이 추워 죽겠다는데 버티라니... 이 집을 택하게 된 큰 이유가 당신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함이었는데, 어찌 나에게 저렇게 매정하게 답할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결국 나는 그 해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본가로 내려갔다. 이전까지는 분명 춥게 느꼈던 본가의 겨울은 더 이상 내게 추위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꺼내주신 두꺼운 이불을 덮고 전기장판 위에 앉아 고구마에 차가운 우유를 먹고 있으니 자취방에서 느꼈던 '겨울',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가난이 주는 고통'이 더욱 분명하게 느껴졌다.
날이 조금 풀리자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집은 여전히 추웠지만 이전보다는 버틸만했다. 입대를 얼마 남기지 않고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한 후 아버지와 함께 짐 정리를 했다. 아버지도 그 집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 마음이 좋지 않으셨으리라. 나는 다시는 이런 집에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큰 창을 통해 해가 쏟아지는 널찍한 방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그래서 나는 '가난'이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