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 자신에게 가장 자주 하는 거짓말
“근데 걔가 나한테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아니 지가 어떻게 나한테 그러냐고.”
옆에 있는 친구와 나는 반대편에 있는 희정의 말에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군대까지 기다려준 희정에게 감동했던 남친 준호는 전역 후 헌신을 다하는 듯 하더니, 새학기가 시작되자 조금씩 변해갔다. 새내기들이 들어온 이후부터 동아리 생활로 조금씩 바빠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희정과의 만남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희정이 그것 때문에 서운해 화를 낼 때면 준호는 불쌍한 표정으로 희정에게 말했다.
“복학하고 이제 학교 생활 좀 열심히 해보려 하는데 좀 섭섭하다. 희정이 니가 하지 말라면 차라리 동아리 관둘게.”
1학년 때부터 준호가 얼마나 열심히 동아리를 해왔는지 알았던 희정은 차마 준호에게 동아리를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아니, 그런 말을 하면 준호가 자신과 더욱 멀어질 것 같은 마음에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런 희정의 인내에도 불구하고 1학기가 거의 끝나갈 때까지 준호의 동아리 생활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희정은 참다 못해 준호에게 크게 화를 냈고, 준호는 적반하장으로 희정에게 이럴 거면 차라리 그만 만나자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방금 전 눈물을 똑똑 흘리며 희정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희정아, 울지마. 나까지 마음이 아프다.”
나는 정말 희정이가 안쓰러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동시에
‘아씨, 오늘은 진짜 공부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하고 있었다.
사실 희정이 이런 하소연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1학년 때 사귀고 난 후부터 군대 있을 때는 물론 전역 후까지 희정은 준호 때문에 마음이 상할 때면 친구들을 불렀고, 그럴 때마다 매번 나왔던 나였다. 슬픔에 빠진 친구를 홀로 두면 안된다는 생각이 강했고, 그게 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러한 생각이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힘들 때만 나를 찾는 사람들이 정작 좋을 땐 어디 있는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만 해도 나는 이번 주에 있을 자격증 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단톡방에서 희정의 푸념을 안읽씹 한 채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데 그런 나를 지켜봤는지 희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 친구가 힘들어 죽겠는데 톡도 안보냐? 나와 누나가 쏠게.”
“나 이번 주 자격증 시험이라…”
“뭐야, 하루 내내 공부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못오겠다구? 나 조금 섭섭해지려고 그래. 민정이도 온다니까 너도 같이 와. 나 진짜 오늘 기분 안좋단 말이야.”
“오늘은 좀 그런데.”
“아, 진짜. 나 상처 받을라 그래? 우리 의리 어디갔어?”
“아 진짜… 민정이도 온다고?”
“그래, 민정이도 온다고 했으니까 6시까지 통집에서 보자.”
“그래. 너 별거 아니기만 해봐라.”
전화를 끊고는 아직도 채 펼쳐보지 않은 책의 분량을 눈으로 가늠해 보았다. 뭐 이틀 정도 딴짓 안하면 볼 수 있을 정도의 양 같아 보였다.
‘그래, 이번만이야.’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니 이미 열심히 떠들고 있는 희정이와 그걸 열심히 듣고 있는 민정이가 보였다.
“뭐야, 둘이서 벌써 이야기 하고 있어?”
내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야, 너 잘왔어. 이제 진짜 클라이막스니까 들어봐.”
맥주 500을 들이키며 희정의 주의 깊게 들어보았다.
“걔가 나한테 헤어지자고 하니까 진짜 걔 기다렸던 1년 넘는 시간이 쫙 생각나면서 진짜 열 받더라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거 있지?”
“그래서 뭐라고 했어?”
민정이 궁금한 듯 희정에게 물었다.
“뭘 뭐라고 해. 내가 우니까 지가 별 수 있어 그냥 나 안아주면서 미안하다고 하지”
“뭐야? 벌써 화해한 거야?.”
“아니지. 준호가 정식으로 싹싹 빌지 않으면 절대 그냥 안 넘어 갈 거야 이번엔.”
나는 갑자기 어리둥절 해져 물었다.
“뭐야. 이미 정리 다 된 거잖아?”
“와… 친구 지금 남친한테 그만 하자는 말 듣고 왔다는데 그런 말이 나와?”
“아니 결국엔 화해 한거네?”
“이게 무슨 화해야 이제 시작이지.”
씨익 웃는 희정을 보고는 더 이상 말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왕 나온 김에 즐겁게 술이나 마시자는 생각으로 사는 이야기와 우스개 소리를 나누며 저녁을 보냈다.
집에 돌아오니 시간은 벌써 저녁 11시. 공부할 상태는 아니라는 판단에 내일을 위해 바로 씻고 잠을 잤다.
‘다음번엔 진짜 거절이다.’
자격증 시험이 이틀 남은 상황 이제는 정말 올인해야 했다. 책을 펴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오 번호 아직 그대로네. 문뱀 나 형운이.”
“누구?”
“에이 섭섭하네. 벌써 나를 잊었어? 7중대 의리가 이렇게 약했단 말이야?”
“뭐야?! 진짜 형운이야?”
전화를 건 녀석은 군 시절 제법 가깝게 지냈던 후임이었다.
“맞다. 문뱀 사는 곳이 전주랬나?”
“어. 맞지.”
“나 오늘 전주 가는데, 얼굴 한 번 보자.”
“아… 오늘?”
“왜? 오늘 좀 어렵나?”
“혹시 모레는 전주 안있지?”
“어, 그때는 어려울 것 같은데? 오늘 무슨 약속 있어?”
“아니, 약속은 없는데. 내가 이틀 뒤에 자격증 시험이라.”
“자격증?, 아… 뭐 문뱀 바쁘면 어쩔 수 없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함께 1년이 넘게 동고동락했던 후임이 내가 사는 지역까지 왔는데 저녁 한 끼 못 먹이고 보내야 한다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에이, 그래도 형운이 왔으면 얼굴 봐야지.”
“역시 문뱀. 그러면 내가 오후 쯤 도착하니까 오랜만에 한 잔 걸치자고.”
“그래그래. 오랜만에 보는데 한 잔 해야지. 도착하면 연락해.”
전화를 끊고 마른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아쒸… 하필이면 이때냐.’
고개를 돌려 책을 보니 아직도 절반 가량이 남아 있었다.
‘그래, 일단 남은 시간 열심히 하고 저녁에 가볍게 먹고 들어오는 거야.’
또 다시 마른 세수를 한 번 한 후 눈앞에 펼쳐진 책을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도착할 후임 때문인지 숙취 때문인지 도무지 머릿속에 내용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참에 잠깐 쉴겸 침대에 누워 눈을 붙인다는 게 그만 잠이 들었고, 얼마나 지났을까 울리는 휴대폰 때문에 잠에 깼다. 형운이었다.
“문뱀 나 도착. 어디서 볼까?”
“지도 찍어줄게 거기서 보자.”
“오케이.”
옷을 챙겨 입고 문을 나서기 직전 독서대에 아직도 절반이 남아있는 자격증 책을 보니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이제와서 나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 이번만. 딱 이번만 나가고 내일부터는 진짜 열심히 하자.’
그렇게 나의 이번만은 또 한 번 그 의미를 잃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