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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다언니의 말맛 Oct 23. 2021

#3.난! 그저 가르침을 통해 '천직'을 만났을 뿐

여자의 적은 여자라더니 난 하루아침에 공금횡령자가 되어 있더라.

누굴 경쟁자로 삼거나 이기기 위함이 아닌 내가 만난 일이 재밌었다. 그러니 아침 6시에 나와 밤 11시에 퇴근이 가능한 게 아닌가. 주말도 스스로 나와 다음을 준비하며 내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 학생들과 학부모를 관리할 수 있는 한 다 관리했던 것이 성공의 비결이자 노하우가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30여 개의 학교와 강사도 관리해야 했다. 당연 그 관리안에는 책임이 따르는 매출이 함께 동반되었고 무궁무진한 아이디어는 끊임없이 연구해야 했다.


수업이 그냥 수업으로만 끝나서는 안되었고 재미가 함께 동반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열정은 그때 당시 한국생산성본부의 ITQ 과목에 대한 매력에 빠져 열띤 가르침이 대유행과 함께 심사 자격으로 부수입도 활발했다. 나의 그런 열정을 알아주셨는지 난 홍보대사로 모델이 되었다. ITQ 응시과목에 대한 규칙과 진행방법을 지도하는 역할이었다.

돌아보니 세상에... 내가 홍보대사에 모델 역할도 했었네... 그저 상공회의소 워드 활용도보다 실용적인 면에서 아이들에게 가치가 높아 열심히 더 많이 가르친 것 밖엔 없었는데 매년 교장선생님들만 받을 수 있다는 감사패도 2번이나 받았다.

우와 돌아보니 너 정말 열심히 살았구나! 대단하다! 대단해~ 사실 그때 당시에는 영상 촬영 당시 경험이 없어 준비를 제대로 못해가서 부끄러워 말도 못 했는데 그때의 과정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줬다는 고마움도 잊은 채 살은 걸까? 그건 아닐 거야 난 그때의 경험으로 그다음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검증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열정이 에너지를 만들어주고 그 에너지로 좋은 날들을 만들어주고 있을 때 나의 어깨는 조금씩 기고만장해짐을 느꼈다. 매일 아이들과 어떻게 하면 재미난 수업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한글과 오감놀이를 살려 함께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컴퓨터 책을 낸 것!


생각해보니 나도 인문학은 아니지만 책을 쓰긴 썼구나. 오래되었고 기술 발달로 지금은 꺼내기 부끄러운 이야기가 되었지만 그 당시 그 아이템으로 알만한 대기업에 있던 난 그쪽에서 책을 내느냐 나와 함께 했던 의리를 지키고자 그 작은 출판사와 책을 내느냐 고민하던 끝에 정보가 없던 난 내 책이 대기업에 아이템으로 귀속되어 내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은 생각에 작은 출판사와 함께 하기로 하게 되었다.


출판 개념이 없고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던 그저 나를 믿고 그 아이템을 믿어 주시고 함께 출간한 책은 이름하야 '깡통 속의 뽀또뽀또' 처음 3000부를 시작으로 12,000원 시작과 함께 전국 세미나로 인기를 끌었고 1년 만에 만부가 팔렸다. 세미나를 통해 영업 비결과 함께 노하우를 전수했던 덕이였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능력은 날로 인정받음과 함께 모 기업으로부터 교육담당으로 스카우트가 되었다.


사실 아이들 가르치고 관리하는 것보다 강사 교육과 관리 그리고 매출을 내는 업무는 쉽지 않았다. 그 역시 차근차근 절차대로 승진한 케이스가 아니었던 터라 따가운 시선은 감수해내야만 했다. 또한 그 시선으로부터 인정받는 길은 실력을 인정받는 길임을 너무나 잘 알기에 다시 하나부터 재정비에 들어갔다. 그렇게 시작된 곳! 내가 맡은 지역은 전국에서 하위를 달리고 있을 때 함께 뭉치니 그 힘으로 3위안에 올려놨고 우린 그로 인한 포상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와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나를 스카우트하셨던 상사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좋아해 주셨고 이로 인해 시너지 효과가 넘치는 날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그 포상금으로 모두가 제주도를 다녀오게 되었다. 그다음 분기에서 상위권으로 올라 홍콩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야말로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만큼 짜릿했다. 그때 당시 해외여행에서 모두들 화장품 쇼핑에 정신이 없었다. 나는 화장품에 관심이 없었다. 그 이후의 시간도 자유시간이었고 홍콩에 지인을 잠깐 만나기도 했다. 짧은 시간에 독일 소시지와 맥주를 맛보고 나를 안전하게 복귀시켜 주었고 여행은 그렇게 마무리되어 일상으로부터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온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 다른 지역 팀장이 할 얘기가 있다며 나를 보자고 했다. 이건 아닌 것 같다 알고 있어야 할 것 같다며... 아무개 강사님이 교육담당인 나를 가리켜 위 상사에게 강사들을 포섭하여 지난번 제주도 포상 시 그 경비에서 300만 원이 빈다며 그 돈을 내가 리베이트를 받았다는 것! 그러며 나에 대해 온갖 헌담을 하고 다닌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 강사님이 터줏대감이고 말이 많은 사람인 줄 알았지만 타깃이 내가 되다니... 정말 손발이 떨리고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강사들보다 나를 직접 스카우트하신 윗 상사의 처신이 더 상처가 되고 말았다. 마치 그게 사실인 것처럼 나를 불러 얘기하며 홍콩에서 개인행동한 것에 대한 부분을 지적도 하셨다. 듣고 보니 인솔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나에게 맞는 말인 것 같아 수긍했다.



그러나 리베트 받았다는 말은 너무 어이가 없어 그날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감정만 앞선채 억울함을 가득 안고 나왔다. 그리고 그날은 펑펑 울었다.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우는 게 전부였다. 아마도 그간의 고생했던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서일까? 아님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두둔하고 감싸줘야 할 사람이지 않았나? 그러지 못했다는 서운함이 밀려와서 그랬을까? 어쩜 그 바닥에서 3년을 1년으로 단축해서 살아오면서 열심히 해왔던 난 지칠 때로 지쳤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정신도 같이 무너지게 놔두고 말았다.


그렇게 난 밤새 울며 편지를 썼다. 그 회사에 부사장에게 그만둘 각오로 포상금의 출처를 낱낱이 밝히며 억울함과 함께 또한 여자의 적은 여자라더니 최선을 다한 내게 돌아오는 게 고작 이게 다인지... 실망스럽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그렇게 편지를 전송한 후에 잠이 들었다. 아침에 초인종이 계속 울려댔다. 모니터를 보니 문제를 만든 강사님이 다른 팀장들과 함께 나를 찾아온 게 아닌가? 핸드폰에는 문자와 전화 부재중들이 와 있었다. 이미 물은 엎질러놓고 사과를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난 없는 척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을 회사를 가지 않았다. 내가 열심히 살아온 날의 보상이 고작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내린다는 사실에 질려버렸다. 가장 믿어줘야 할 사람에 대한 배신도 한 몫했겠지. 그런 사람에게 충성을 해왔다는 게 더 상처였겠지만...


며칠 후 부사장님의 연락을 받고 면담이 있었다. 익히 나에 대해서 알고 계셨고 나를 지켜봐 주셨던 분이고 응원도 해주셨던 분이시다. 말씀은 달래주셨으나 다른 길을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사실, 내가 메일을 보낸 뒤 다음날 본사 회의 때 재떨이가 내 윗 상사에게 날아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속으로는 고소했다. 영업력이 뛰어났던 그 사람의 사과에도 다신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뒤늦게서야 영업비로 빼놨던 300만 원이 생각났다며 미안하다고... 그 또한 그 비용도 내 능력으로 빼놓았음을 어찌 잊으셨는지. 최소비용으로 경비 사용하느라 애쓴 것도 모르고 말이다.


그저 내게 찰떡같은 가르침을 통한 경험으로 천직을 만나 내가 가장 잘할 수 있었던 강점을 살렸던 것뿐인데... 왜 늘 질투에 대상이 되어야 하고 눈치를 봐야 하고 내가 가진 것을 다 나눠주고도 할 말을 못 하고 살았었는지 말이다.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스트레스받으면 한잔 술에 달래며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가끔은 안주삼아 험담도 하며 그렇게 풀었을 뿐인데 사람을 하루아침에 양쪽 얘기 다 들어보지도 않고!!


여자의 적은 여자란 말 정말 공감 백배했던 날 잊히지 안 더 라~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할 날이 될지 몰랐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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