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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다언니의 말맛 Oct 22. 2021

#2. IMF 세대였던 나는 막내라는 이유로 희생양

인생역전의 기회로 천직을 만나는 기쁨

나는 '밀레니얼 세대'의 선조다. 4050이다. 20여 년 전, 어렸을 때 뿔뿔이 흩어졌던 우리 셋은 다시 집을 되찾아 모여 살 수 있었다. 첫 사회생활은 준비했던 만큼 기회가 되어 주었고 친구들보다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직장생활이 시작되면서 부모님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언니가 했던 것처럼, 첫 봉급 58만 원, 두 번째 달부터는 70만 원에서 15만 원을 빼고 모두 집에 드렸다. 꼬박 1년을 그렇게 해왔다. 그러던 중, 내 미래와 앞날이 걱정되었다. 내 안의 잠들어있던 꿈이 화났던 걸까? 나도 모를 화가 하늘까지 치솟았고, 기본 생활비 외에는 보너스가 있는 날은 삥땅을 쳐서 적금을 붓기 시작했다. 그렇게 악작같이 1년이란 시간을 보냈더니 목돈이 됐다.


여유롭던 친구들은 취업 대신 학업을 선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딘가 모를 무기력이 몰려왔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앞날을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만 뒤처진다는 생각이어서였을까? 질투였을까? 돈을 벌어야만 했던 처지에 화가 났다. 나이 차이가 있는 큰오빠와 언니에게는 상담할 수 없었다. 작은오빠에게는 오히려 돈을 빌려주는 입장이었다. 난 그때부터 내가 의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나의 독립 의지는 꿈틀 되었다.



멋지게 살고 싶었다. 새벽반을 통해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보란 듯이 차를 뽑았다. 그때 내 나이는 21살이었다. 내 삶에 잔고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을 무렵 외환위기 'IMF'가 닥쳤다. 들어도 들어도 모를 내용들이었고,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인 줄만 알았다.


경제위기는 회사에도 영향을 주었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내가 있는 곳은 중요 부서였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고 했던 주변 사람들의 말과는 달리, 가장들은 살려야 한다며 가장 어린 막내들 순서대로 해고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나마 지금 자진퇴사를 하면 퇴직금이라도 챙겨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두려웠고 불안했던 어린 난, 분위기에 떠밀려 일부 동기들과 함께 자진퇴사를 했다. 4년 만에 안정된 직장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퇴직. 사회의 약자라는 사실에 절망감이 밀려들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의 코로나19의 사태가 시작됐던 것처럼 사회의 분위기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희생양이 되었던 난 취업이 잘되는 방향으로 전공을 잡아 웹 정보산업 관련학과에 들어가 대학교 시절을 보냈다. 막상 들어가니 나와는 맞지 않는 분야였다. 겨우 졸업을 앞두고 나와 맞는 취업에 도전장을 내밀었을 때 28살이었다.



지금은 기억도 안나는 선배가 있다.


"자기 컴퓨터학과 나왔지?"


"네..."


"oo학교 컴퓨터 과목 좀 가르쳐 볼래?"


나이가 있던 난 이것저것 가릴처지가 아니었다.


"네! 해볼게요!"


그렇게 첫날 출근을 해서 수업 진행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초등학교 수업이라 그런지 꽤 흥미 있고 재밌는 분위기가 좋았다. 그런데 분위기가 어찌 인수인계받고 있는 느낌적인 느낌... 뭐지 이 불안한 예감은?


4일 만에 인수인계는 끝났고 얼떨결에 방과 후 컴퓨터 강사가 되었다. 이런! 난감하네. 이쪽 분야에 전혀 지식도 정보도 없었던 난 주어진 과목부터 가르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했고, 분위기를 익혀야 했다. 물어볼 곳도, 의지할 곳도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하나하나씩 물어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왁자지껄 친구들의 목소리들이 들린다.

"선생님~~~ 새로 오셨다."며 해맑은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이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다.


나에겐 친조카들이 7명이나 있다. 그들에겐 난 신 같은 존재이자 명절이면 유일한 왕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난 아이들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아이들을 다루는 것만큼은 타고났다고 해야 하나 나와 함께할 운명적인 180명의 아이들이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 악작같이 두어 달을 버티고 나니 익숙해졌고 익숙해지니 이 일이 너무 재밌지 않은가. 전공과목일 때는 너무 하기 싫었던 컴퓨터 관련 과목들이 가르치기 위해 공부를 하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1년 반 만에 그 분야에서 제일 잘 나가는 강사가 되었고 500명이 훌쩍 넘는 인원을 다루고 있었다. 재밌어하는 내 모습에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학교도 아닌데 제일 먼저 출근해서 준비를 하고 제일 늦게 퇴근했다. 일이 재밌다 보니 돈은 알아서 따라왔다. 일이 즐거우니 IMF가 내게 안겨준 생활고를 이겨낼 수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을 돌봐주기도 했고 학부모와 유대관계가 깊었다. 동네 비싼 컴퓨터 학원을 다니던 아이들도 시간을 조정하여  이른 아침 내 수업을 들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고마운 날들이었겠나.


학교 재량수업시간 선생님들의 일도 도와주기도 했다. 절로 신뢰가 쌓여갔고 학교에서 진행되는 까다로웠던 결제라인은 막힘없이 내 앞길을 열어주었다.


잠을 자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매일매일이 수업에 접목할 아이디어가 솟아났고 나에게 배우려는 보조강사들이 늘어났다. 그들은 열심히 노하우를 배워 각자의 위치에서 대박 강사가 되었다. 나의 실력을 입증이라도 해주듯 감사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20대 후반이 돼서야 가르치는 것이 나의 '천직'임을 알았다. 어릴 때...... 아주 어릴 때, 어른들이 "이다음에 크면 뭐 될 거야?"라고 물을 때 "유치원 선생님이요. 미술 선생님이 될 거예요."라고 했던 말들. 동네에서 놀 때 골목대장은 아니었어도 꼭 선생님을 도맡아서 했던 난 꿈을 이룬 건 아닐까? 내가 꿈이란 걸 너무 어렵게 생각했던 건 아닐까? 너무 돌고 돌아 온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만난 천직은 더욱더 성장으로 이끌어 1년 반 만에 지역을 맡을 팀장으로 승격시켜주었다. 그와 동시에 주위로부터 시기와 질투 대상이 되었다.

과연 난 천직을 만난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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