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구름 Oct 22. 2023

프롤로그:  90년대 어린이의 하루 일기

1996. 9.11. 수요일. 날씨 맑음


 진공 청소기 소리에 깼다. 엄마는 매일 아침 청소기를 돌리며 우리를 깨운다. 거실에 나가보니 엄마는 어느새 청소는 다 끝내고는 도란스에 110V 다리미를 연결해놓고 아빠 와이셔츠를 다림질 하고 있다. 냉장고 문을 열어 델몬트병에 담긴 보리차를 꿀꺽하니 정신이 든다. "밥 차려놨으니까 빨리 밥 먹어." 엄마 말에 식탁에 앉았다. 빨간 체크 식탁보 위 식탁 유리가 팔꿈치에 닿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엄마는 대체 몇 시에 일어나길래 청소, 다림질, 요리까지 아침에 다 하는걸까.

 오늘은 장학사 오는 날!  저번 주부터 우리들은 학교 청소를 했다. 교실, 계단, 창틀, 심지어 마룻바닥까지. 쪼그려 앉아서 왁스를 발라 손걸레질을 하는데 허리도 아프고 이상한 냄새가 나서 힘들었다. 그리고 손을 씻어도 왁스 기름이 잘 지워지지 않았다. 선생님이 칠판 정리를 잘 해놓으라고 해서 난쟁이 분필들은 다 치웠고 칠판 지우개도 깨끗이 털어놨다. 장학사가 우리 교실에도 잠깐 들어와 수업을 살펴 보다가 나갔다. 분필 꽂이를 잡고 칠판에 글씨를 쓰는 선생님의 손이 떨리고 목소리가 염소처럼 떨렸다. 장학사가 되게 높은 사람인가 보다. 무서운 우리 반 담임 선생님도 긴장한 걸 보면.

 정현이가 쉬는 시간에 다마고치를 꺼냈다. 작은 화면 안 조그만 녀석이 배고프다고 삑삑대고 똥을 쌌다고 삑삑댄다. 나도 해보고 싶어서 정현이 것을 잠깐 빌렸다. 다마고치에게 밥을 줘봤는데 잘 받아먹고 웃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포도알 스티커 다 모으면 나도 엄마한테 다마고치 하나 사달라고 해야지.

 영어 방과후 수업이 끝나고 문방구에 들렀다. 요즘 문방구 앞에 새로 들여온 오락기 때문인지 남자 애들이 모여있었다. 아저씨가 또 문어발을 구웠는지 냄새가 난다. 뭐 먹을까 고르다가 쫀드기를 골랐다. 저번에는 구워달라고 했지만 오늘은 그냥 먹을거다. 문어발을 구운 부르스타에다가 또 쫀드기를 구우면 냄새가 배니까. 정현이는 뽑기를 했다. 꽝이 나왔다. 옆 반 은정이는 저번 주에 1등상에 당첨되어서 큰 잉어 모양 엿을 받았다고 자랑을 했다. 정현이 말이 은정이는 먹다가 지쳐서 다 그 잉어 엿을 결국 다 부숴 버렸다고 했다. 그런데도 정현이는 언젠가는 꼭 뽑기에서 1등을 하고 싶다고 했다.

 피아노 학원에 가기 전에 비디오 가게에서 빌린 짱구는 못말려 2를 반납했다. 피아노 학원 끝나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롤러랑 자전거를 타다가 놀이터에 가서 고무줄 놀이도 하고 허수아비도 하고 돈까스도 했다. 나는 정현이랑 같은 팀이었는데 오늘따라 정현이가 자꾸 줄에 걸려서 우리 팀이 져서 슬펐다. 허수아비랑 돈까스 때는 데덴치 해서 팀을 다시 짜서 다행이었다. 정현이네 팀이 계속 졌다. 정현이는 달리기는 잘 하는데 놀이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다. 우리 팀이 이겨서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천사소녀 네티 하는 날이라 빨리 집에 들어왔다. 은하철도 999랑 같은 시간에 해서 맨날 동생하고 싸우는데 오늘은 내가 먼저 집에 들어와서 텔레비전을 켰으니 천사소녀 네티를 보는 날이다. 셜록스는 언제나 봐도 멋있다. 우리 반에 셜록스 같은 남자애가 있었으면 좋겠다. 네티는 학교 다닐 때는 머리를 풀고 도둑질을 할 때는 머리를 높이 묶는데 셜록스는 그걸 못 알아본다. 얼굴도 똑같고 목소리도 같은데 말이다. 그래도 네티랑 셜록스가 잘 됐으면 좋겠다.

 엄마가 저녁에 청국장을 끓였다. 웩, 난 진짜 싫다. 아빠랑 동생은 맛있다고 먹는데 난 밥만 퍼먹다가 엄마한테 혼났다. 엄마는 맨날 고등어는 DHA가 풍부해 머리에 좋고, 양파를 먹으면 피를 맑게 해주고, 청국장을 먹으면 단백질이 풍부해 장에 좋다고 한다. 난 맛있는걸 먹고 싶다. 건강에 좋은거 말고. 겨우 다 먹고 방에 들어와서 엄마가 며칠 전에 방문판매원에게 산 과학 전집 중 몇 권을 읽었다. 한 권 읽을 때마다 독후감을 써야 하지만 전집을 다 보면 포도알 스티커 열 장을 준다고 했으니 금방 다마고치를 사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얼른 독후감을 쓰고 수학익힘 숙제도 해야겠다. 빨리 끝내고 전설의 고향 봐야지.

 오늘도 즐거운 하루였다. 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