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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구름 Oct 22. 2023

방학 탐구생활은 엄마 숙제였다

 2주간 아이의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유치원에서 내주는 방학숙제는 스무페이지 정도의 유인물 꾸러미였다. 방학 계획표 만들기서부터 한글과 숫자 공부, 오리고 꾸미기 활동까지 적은 양이지만 꽤 알토란 같은 모음집이었다. 아이는 재미있다며 혼자 의자에 앉아 오랜 시간 숙제를 했다. 어린 손으로 가위질을 하는 딸을 보며 내 어린 시절 방학 숙제가 떠올랐다.


 90년대 국민-초등학생들은 방학식을 할 때 살구색 탐구생활책을 받았다. 여름 방학에 한 권, 겨울 방학에 한 권 완성해가야 하는 숙제였는데 실험, 견학, 체험 등 다양한 주제가 들어있었다. 적당히 해가면 그리 크게 신경 쓸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사진과 그림 등 이것저것을 추가로 붙여 표지가 덮이지 않을 정도로 두껍게 만들어 오는 것에 경쟁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나였다. 엄마가 해 준 방학 숙제를 들고 말이다.


 당시 우리는 대전에서 살았는데,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에 가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반 친구 엄마가 운전하시는 르망에 어른 셋, 아이 다섯이 구겨타고 한 시간 남짓 걸려 독립기념관에 도착했다. 고작 여섯 살에서 여덟 살이었던 우리는 전쟁이 뭔지, 독립이 뭔지 알 지 못 해, 설명문을 읽어보아도 뜻을 알 길이 없어 금세 흥미를 잃었다. 크나큰 전시관들을 돌면서 다리가 아팠지만 엄마들의 사진 찍자는 말에 얌전히 포즈를 취했다. 필름 몇 통을 다 비우고 나서야 사진 찍기는 끝이 났고, 다시 그 르망에 여덟 명이 욱여타고는 헤드뱅잉을 하듯 졸면서 돌아왔다. 며칠 후, 사진관에서 뽑아온 사진들을 A4용지에 붙이고 엄마가 불러주는 전시 내용과 다녀온 느낀 점을 받아적었다. 엄마는 그렇게 만들어진 A4 몇 장에 물풀을 발라 독립기념관이 주제인 탐구생활 페이지에 꼼꼼히 붙여주었다.

  탐구생활 하면 또 빼먹을 수 없는게 자연에 관한 주제였다. 투명 유리컵에 물을 넣고 양파 뿌리를 담가 몇 주간 줄기를 키워낸 기록을 정리하고, 문방구에서 파는 톱밥 얼굴에 심긴 씨앗을 틔워 초록 머리카락을 길러냈다. 물론 그 모든 과정은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했다. 양파가 담긴 물을 수시로 갈아주고, 햇볕 잘 드는 양지에 톱밥 얼굴을 놓아 분무기를 칙칙 뿌려 머릿결을 다듬어 주었다. 식물들이 잘 자라기를 염원하는 엄마의 바람은 빵빵해져가는 내 탐구생활만큼 커갔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탐구생활은 거의 성인의 반 뼘 크기는 되었다. 개학날에 엄마의 기대를 업고 등교해서 방학숙제를 제출하면 선생님들의 눈은 잔디인형의 눈처럼 동그래졌고 애썼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일, 이주일이 지나고 엄마에게도 보상이 떨어졌다. 상장이었다. '위 어린이는'으로 시작하는 문구가 엄마 눈에는 '위 어머니는'이라고 바뀌어 보이기라도 하는지 소중히 받아들고 TV장 위에 며칠 전시해 두었다. 감흥이 시들해질 즈음, 엄마가 직접 만든 내 이름이 적힌 상장 모음집에 그 보상을 고이 모셔두었다.    


  

 삼십년 가까이 묵혀 떠올린 기억은 나쁘지만은 않게 채색이 된 것 같다. 엄마의 성화가 귀찮기도 했지만 내심 같이 보내는 그 시간이 재미있었다. 엄마가 나에게만 집중하고 있는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거 틀렸잖아. 다시 써." "똑바로 서!" 명백한 잔소리에도 별 대꾸 없이 따랐던 건 엄마의 타오르는 열정이 느껴져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내 숙제였지만 엄마가 더 열심히 했던 별난 방학 숙제.  


  그 때 엄마가 기를 쓰고 만들었던 탐구생활은 24시간 자식들과 함께 하는 길고 긴 방학에 찾은 간절한 낙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무언가에라도 잠시 집중을 하지 않으면 아이 뒤치다꺼리에 미칠 것 같은 순간이 있긴 하더라. 그 시절 엄마한테는 내 탐구생활이 두꺼워질수록 지친 일상에 당신이 만들어낸 성취감 덩어리들이 쌓였을지도 모르겠다. 딸의 방학 숙제를 가지고 만들어내는 혼자만의 작은 프로젝트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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