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냄새를 맡으면 소환술마냥 과거의 날을 불러온다. 차를 뽑아타고 교외로 나가 드라이브를 하면서 창문을 내려 맡은 길 가에 흐드러지게 쏟아지는 풀내음, 소개팅을 하면서 처음 만난 상대에게 풍겨오는 향수 잔향, 며칠 입고 빨래하려고 꺼내놓은 엄마 잠옷에 코를 가져다대며 맡았던 포근하고 그리운 냄새, 그리고 환기가 잘 되지 않아 쿱쿱하고도 습기찬 한밭도서관 지하 식당에서 먹었던 컵라면 냄새.
어릴 적에 도서관을 가면 항상 우리 가족은 지하 식당에서 컵라면을 먹었다. 당시 컵라면이라고 할 게 종류가 많지는 않았지만 동생과 나는 '육개장' 하나씩이면 충분했다. 평소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던 엄마는 라면을 잘 끓여주지 않을 뿐더러 어쩌다가 한번씩 끓여주면 라면 봉지 뒤에 적혀있는 레시피를 모조리 무시했다. 짜다는 이유로. 장마에 한강물 불어나 듯, 큰 냄비에 물을 붓고 라면 두세개를 끓여주었는데 라면 국물인지 맹물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밍밍한 맛이었다. 한강물 라면만 먹어왔던 여덟, 아홉살 인생에서 도서관 지하 매점 주인 아주머니가 정량의 물을 부어주는 컵라면은 찌릿찌릿 전율이 흐를 정도로 충격적인 맛이었다. 급한 마음에 힘 조절을 잘 못 해서 양쪽 길이가 다르게 뜯긴 나무젓가락으로 엄마가 접어준 컵라면 덮개 그릇에 한 가득 면을 담았다. 덮개 그릇에 퍼담을 수록 그 짭짤하고 얼큰한 라면이 사라지는게 아까워서 면발 하나씩만 집어 조심스레 호로록했다. 태풍 모양 어묵과 동그란 노란색 건더기 맛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게 맛있냐며 이것만 먹고 이제 다시 책 열심히 읽어야 한다고 조건을 거는 엄마도, 옆에서 한 입만 달라며 입맛을 다시는 아빠도, 벌써 라면을 끝내고 과자를 주워먹는 동생도 우리 가족 모두는 도서관에서 먹는 인스턴트 점심 식사를 만족해했던 것 같다. 아직도 공기가 잘 통하지 않아 꿉꿉한 습기가 차 있는 지하 식당에서 풍기는 라면 냄새를 맡게 되면, 컵라면 먹을 생각에 도서관 가는게 설렜던 어린 시절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컵라면을 다 먹고 책을 또 보다가 집에 가기 전 도서관 앞 넓은 공터에서 배드민턴을 쳤다. 높은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빛도 따뜻하고 겨울 바람처럼 매섭지 않아 선선히 부는 가을 바람은 생활 체육하기에 알맞았다. 책도 다 읽고 좀이 쑤실 때 쯤 엄마 아빠와 팀을 갈라 배드민턴 몇 판 치고 나면 어딘가 마음이 가벼워졌다. 즐거운 운동 후, 대출 받은 책들을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어쩐지 몸도 마음도 1cm는 자란 것 같아 뿌듯했다. 가족과 함께 하는 별 거 아닌 그 주말이 너무 즐거워 다음 주에 도서관에 또 가자고 먼저 이야기 하곤 했다. 무려 컵라면을 먹고 책을 읽고 운동도 하니, 어린 나이에도 가성비 좋은 주말 나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이가 생각하는 도서관 냄새는 어떨까. 부쩍 책에 관심을 가지는 아이를 데리고 중고 서점이나 어린이 도서관을 자주 다니지만 아직 한번도 도서관에 가서 무언가를 먹어보진 않았다. 책을 빌리러 가는 길에 냄새 하나 추가해준다면 나중에 딸이 컸을 때 도서관을 생각해보면 라면 냄새 솔솔 나는 더 재미있는 추억이 되지 않을까 싶다. 검색해보니 집 근처 도서관 매점에서 컵라면을 판단다. 이번 주말, 도서관 컵라면 한 그릇 때리러 갈까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