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산책을 하며 중심 상가 쪽으로 걸어가다보면 한 건물에 카페와 빵집, 식당, 술집 등이 꽉꽉 들어차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좁은 땅에 사는 사람들은 먹을 데에 진심이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우리도 일주일에 몇 번은 외식을 하는데 집에서 먹는 것보다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점과 뒷정리 및 설거지를 할 필요가 없다는게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우리 가족이 제일 좋아하는 메뉴는 베트남 음식이라 많을 때는 일주일에 두 세번도 쌀국수를 먹고는 한다. '말로만 쌀국수' 말고 향신료 듬뿍 들어간 전통 베트남 현지식 식당을 몇 군데 뚫어놓았다. 레몬그라스, 민트 등의 향신료와 소고기 양지를 푹 끓여낸 국물에 쌀로 만들어 툭툭 잘 끊기는 국수의 맛은 소고기 뭇국 같이 익숙하면서도 향이 이국적이다. 베트남 사장님이 만들어놓으신 특제 양념장을 한 숟갈 넣고 고수를 왕창 올려먹으면 맛이 또 달라진다. 탄탄면 같기도 하고 똠양꿍 같기도 한 것이 쌀국수 하나로 다양한 변주를 줄 수 있어 무한대로 들어간다. 아이는 쌀국수면보다 라이스페이퍼를 국물에 넣고 불려 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짭조름한 국물이 쫄깃한 라이스페이퍼에 배어 그 자체로 국수면이 된다.
외식 메뉴에 쌀국수가 있다면 여유를 충전하기 적합한 곳은 카페라고 할 수 있다. 소세지빵과 소금빵을 좋아하는 아이를 데리고 베이커리 카페를 종종 다닌다. 풍경 좋고 넓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원하는 빵 몇 개를 담아와 커피와 마시면 멀리 나가지 않아도 놀러나온 것 같이 기분이 선선해진다. 식구 셋이 각자 책을 보고, 색칠 공부와 종이 접기를 하고, 게임을 하면서 일주일간 뭉쳐있던 긴장을 한가로운 여유로 풀어내곤 한다. 카페 창 밖으로 펼쳐진 저수지와 푸릇한 산을 보며 커피 한 모금, 풍경 한 모금 호록 하다보면 한 두시간은 금방 흘러간다. 딸이 혼자하던 소일거리를 마치고 심심해하기 시작할 즈음 자리를 정리하는데, 뒤뚱뒤뚱 걷는 아기를 데리고 막 도착한 가족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은은한 동질감과 한편으로는 낯섦을 느낀다. 아직 제대로 된 말도 할 수 없는 나이인데 당연한 듯 자리에 앉아 주스를 마시는 아이가, 키 작은 어른처럼 보였다. 하긴, 우리 딸도 걷지도 못 하는 아기 때부터 카페에 다녔다. 전국 음식점에 다 있다는 이케아 아기 의자에 앉아 유기농 곡밀빵과 뽀로로 주스를 마셨더랬지. 추운 겨울날 집에만 있기 답답해서 유모차 방한 커버를 뒤집어 씌우고 20분 거리에 있는 카페를 찾아가 요구르트를 먹이고 돌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따져보니 내 아이는 카페를 다닌지 벌써 7년째가 되는 것이다. 문득 30여년 전이 떠올랐다. 이 세련된 외식 문화를 누리는 요즘 어린이들과는 달리 나의 어릴 때는 어땠었지?
90년대는 지금처럼 식당이나 카페가 많지 않았다. 식당이라고 해봤자 어른들 회식 장소로 선호되는 메뉴가 전부였다. 돼지갈비집, 매운탕집, 중국집 그리고 경양식집 같은 곳. 아파트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 가족 모임은 근처 돼지갈비집에서 이루어졌다. 세로 구멍이 뚫려있는 스텐 불판에 양념돼지갈비를 올리면 지지지익 하는 소리로 침이 생기고, 달콤 짭짤한 고기 익어가는 냄새에 재잘재잘 떠들던 우리들은 눈을 떼지 못 했다. 엄마들은 가위로 갈비를 턱턱 잘라내어 아이들 접시에 담아주고 아빠들은 일상 얘기를 하며 맥주 한 잔 기울였다. 양념을 묻히기 싫어 처음엔 두 손가락으로 시작했지만 한 입 두 입 먹을수록 돼지갈비에 대한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 열손가락으로 갈빗대를 들고 성치 않은 이빨들로 열심히도 뜯어먹었다. 앞니와 송곳니가 빠졌어도 다 씹어 먹을수 있었다. 고기 그대로 한 입, 상추에 싸서 한 입, 김치랑 같이 한 입. 싹싹 긁어먹고는 후식으로 나오는 매실차를 호로록 마시면서 식사를 마쳤다. 아, 아직 하나가 남았다. 입구에 차려진 커피 기계에서 밀크 커피를 뽑아먹으면 코스가 비로소 끝이 났다. 모든 어른들 손에 들린 종이컵에서 퍼지는 밀크 커피향은 돼지갈비향 못지 않게 퍼져나갔다. 엄마한테 몇 모금 얻어먹는 맛은 카라멜을 녹인 물처럼 달달했다. 돼지갈비와 커피라니, 안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잘 맞는게 다 큰 지금도 지나가다 돼지갈비 냄새만 맡아도 자동으로 그 자판기 밀크 커피가 생각나는 것이다.
일상 외식에서 돼지 갈비를 주로 먹었다면 크리스마스나 생일 같은 특별한 날에 먹는 특별 외식은 따로 있었다. 대전에 살았던 우리 가족은 특별한 날에 성심당을 찾았다. 칼바람이 불던 한겨울에 온 가족이 잘 차려입고 성심당으로 갔다. 주황 불빛으로 장식된 성심당은 어두운 밤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우뚝 솟아 어린 마음을 간지럽혔다. 추운 입김을 뿜으며 딸랑 소리와 함께 문을 열면 고소한 빵 냄새가 마중 나왔고 따뜻한 온기가 온 몸에 닿아 몸을 녹여주었다. 1층에 빵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2층으로 올라가면 테이블이 있었다. 코트를 벗고 앉아 음식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더랬다. 따뜻하다 못 해 입 천장이 데일만큼 뜨거운 옥수수 스프를 한 그릇 클리어 하며 입맛을 돋우고 있자니 얼마 안 있어 돈까스 등장. 갓 튀겨나온 얇고 넓다란 돈까스 위에 뿌려진 달콤새콤한 소스와 소복히 담긴 양배추 샐러드, 아이스크림 한 스쿱 사이즈인 쌀밥, 사이드 메뉴로 마요네즈 듬뿍 묻힌 마카로니까지 한 접시에 놓였다. 김이 올라오는 따뜻한 돈까스를 한 입 먹으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엄마, 아빠가 나이프로 잘라주던 한 입 크기의 돈까스 조각들, 얼핏 들리던 구세군 자선 냄비 종소리. 가족과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에 돈까스는 아주 제격인 메뉴였다.
너무 많은 가짓수와 유행들로 메뉴는 다양해졌을지언정 '오늘 뭐 먹지?'에 대한 선택은 오히려 더 어려울 때가 있다. 이럴 땐 역시 어린 날 먹었던 추억의 맛을 소환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쌀쌀해진 날이니 뜨거운 옥수수 스프와 돈까스를 오늘 저녁 메뉴로 해야겠다. 돼지갈비와 밀크커피는 내일 점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