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와서 연기된 운동회
지금은 아침 7시 50분, 창문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딸을 보며 같이 마음 졸이는 학부모가 있다.
아침에 웬 장대비람, 하필 오늘 같은 날에.
창문을 때리는 거센 빗줄기에 아이의 눈이 설마하며 의심이 실망으로, 분노가 체념으로 변했을 즈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긴급> 7세 운동회 우천으로 인한 취소 알림'
운동회 날 엄마 아빠 앞에서 멋진 장구 실력을 뽐내겠다며 집에서도 연필을 가지고 별달거리와 이채를 치던 아이였다. 유치원에서 장구 장기자랑을 준비했던 모양이었다. 고래팀, 상어팀으로 나뉘었는데 자기는 상어팀이라며 응원법도 배워왔다. 어제 저녁에는 밥을 먹다말고 '베이비 샤크' 노래를 당장 틀어내라며, 엄마도 같이 해야한다면서 응원법을 가르쳐주었다. 손으로 상어꼬리 모양을 만들어 엉덩이에 붙이고 흔들고 있자니 딸의 설렘이 전염되었다.
불안하게도 내일은 비가 온다는 예보가 떴다. 변덕스러운 가을 날씨니까 틀릴 수도 있겠다고 애써 생각했지만 예보는 그 어느 때보다 정확했다.
아이의 소원이 아침에 내린 세찬 빗줄기에 고스란히 씻겨 내려갔다. 운동회는 연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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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기가 펄럭인다. 높다란 가을 하늘 아래 운동장 한 가운데에서는 교장선생님의 개회식 말씀이 한창이다. 좀이 쑤시지만 얌전히 서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운동회가 시작되니까. 머리에 파란 띠, 하얀 띠를 둘러맨 친구들이 청군-백군으로 팀이 갈리고, 시작도 전에 서로 의기를 투합하여 다른 색 머리띠를 하고 있는 친구들은 적인냥 대한다. 으르렁, 으르렁.
나의 첫번째 순서는 단거리 달리기였다. 가족의 응원을 등에 업고 스타트 라인에 섰다.
탕!
화약총이 발사되었다. 6명이 한꺼번에 달리는 경주에서 순위권으로 들어왔다. 어릴 때는 제법 날쌨던 것 같다. 적장의 목이라도 베어온 장수마냥 의기양양 자리로 돌아가자 엄마는 김밥 하나를 입에 넣어주었다. 고소한 참기름이 입 안에서 퍼지고 아사삭 단무지가 씹혔다. 파란머리띠를 다시 고쳐 매어 바람에 흩날리는 잔머리칼을 단디 단속했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운동장을 흔드는 응원 소리에 청군 이겨라를 따라 외쳤다. 평소에는 엄마가 이 썩는다고 못 먹게 한 콜라를 꿀꺽 마셨다. 탄산 방울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단숨에 뱃 속을 차갑게 만들었다.
캬, 이 맛에 운동회 하지.
콩을 던져 장대에 달려있는 박 터뜨리기, 있는 힘을 다해 잡아 당겼던 줄다리기, 굴렁쇠 이어굴리기, 이어달리기 등 재미있는 행사가 많았다. 그 중 부모님들을 위한 쇼타임으로 '갑돌이와 갑순이'가 있었다. 요란한 빨간 치마에 색동 저고리 한복을 입고 연지곤지를 찍고는, 선생님이 랜덤으로 정해준 남자친구와 '갑돌이와 갑순이'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운동회에 이게 뭔 장기자랑이냐 싶으면서도 몇 날 며칠을 더운 오후에 땀 흘려가며 연습했으니 이왕 할 거 제대로 하자는 마음에 웃음을 지어가며 열심히 추었더랬다. 한 쪽에서는 고학년 언니, 오빠들의 기마전이 열려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가운데 저학년들의 쇼는 진행되었다. 흙먼지를 잔뜩 먹으며 웃었던 갑순이 갑돌이들의 깜찍한 공연으로 부모님들의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높은 하늘에 닿을만큼 충족되었다. 엄마는 집에 오는 내내 갑돌이 갑순이 이야기를 했다.
오늘 비가 오지 않았다면 아이의 운동회는 어땠을까. 부모가 되어 가보는 운동회는 어릴 적 손 꼽아 기다린 운동회만큼 기다려진다. 돗자리와 간식거리를 챙기고, 김밥 속재료는 뭘 넣어야 할 지 즐거운 고민을 해봐야지. 아, 콜라도 챙겨야겠다.
엄마가 갑순이를 왜 그리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나 역시 딸의 장구쇼가 가장 기대된다. 작은 손에 장구채를 쥐어잡고 덩덩쿵덕쿵 가락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고 싶다. 아직 유치원에서 새로운 공지는 없지만 그 날은 무조건 맑았으면 좋겠다. 좋은 날로 잡아주세요. 해 쨍쨍, 좋은 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