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구름 Oct 22. 2023

올해엔 첫 눈이 빨리 왔으면..

봉숭아물 다 사라지기 전에

 전원주택에 사시는 시부모님은 집 앞 작은 텃밭에 오이, 가지, 호박 등 다양한 작물을 키우신다. 그 한 뙈기 밭에 봉숭아 몇 줄기가 자라고 여름이면 알록달록 예쁜 빛깔의 꽃을 피워낸다. 남편은 주말에 딸아이만 데리고 시댁에 다녀오곤 하는데 얼마 전 아이의 손톱에 붉은 노을이 들어있었다. 할머니가 봉숭아물을 들여주셨다고 열 손가락을 자랑스럽게 내밀며 "엄마, 이거 첫 눈 올 때까지 그대로 있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대." 꽤나 진지하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 딸 소원이 뭐야?"라고 묻자 "그건 비~밀!"이란다. 칫, 아이의 흥을 위해 짐짓 삐진 척 했지만 그 어린 마음이 얼마나 진지한지 잘 알고 있다. 여덟 살이었던 나도 소원이 달린 봉숭아 물 손톱을 가지고 있었기에.


 같은 반,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친구와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다 집에 들어갔다. 퇴약볕 한 여름의 태양에는 비글같이 체력이 넘치는 아이들도 잠깐의 휴식이 필요했다. 엄마가 델몬트병에 넣어둔 보리차를 냉장고에서 꺼내어 친구와 벌컥벌컥 들이켜고 다시 나가려고 했을 때였다. 봉숭아물을 들이지 않겠냐고 아빠가 물어보셨다. 중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빠는 여름 방학을 맞아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는데, 산책을 하다 아파트 화단에 심겨있는 봉숭아를 보셨나보다. 친구와 나는 신이 나 당장 물을 들이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스무 손톱에 물들일 만큼의 봉숭아꽃과 잎을 따왔다. 아빠는 크고 편평한 돌을 준비하시더니 봉숭아 꽃과 잎 몇 장을 그 위에 놓으셨다. 서랍 구석에 있던 명반 몇 개를 톡톡 떨구어 넣고 함께 찧자, 빨갛고 자줏빛 꽃잎들이 초록 잎사귀와 잘게 섞이면서 즙이 나왔다. 

 베란다 큰 창으로는 오후 해가 천천히 지고 있어 다홍빛 햇볕이 들어왔다. 삼복 더위에 하얀 런닝셔츠를 입고 조심스레 꽃잎 덩어리를 올려주시던 아빠의 얼굴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안경이 땀에 밀려 자꾸 내려오는지 봉숭아꽃잎무리를 만지고 있는 손 대신 연신 어깨로 안경을 올리셨다. 그러고는 물이 잘 들도록 비닐 조각과 튼튼한 명주실로 손가락을 둘둘 말아 손톱에 딱 고정시켜주셨다. "소원 하나씩 생각해봐. 첫 눈 올 때까지 봉숭아 물 손톱이 남아 있으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대." 그 한 마디에 친구와 나는 봉숭아 물과 더불어 소원까지 손톱에 잘 밸 수 있도록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답답했던 손가락이 자유를 얻었을 때, 손톱을 넘어 손가락 한마디가 여름 햇볕과 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다홍물이 아주 잘 들었다. 쿰쿰하면서 쌉싸름한 냄새가 손가락 전체에 배었지만 그만큼 손톱에 소원이 잘 스며들은 것 같아 기쁘기만 했다. 친구와 니 손톱이 이쁘니, 내 손톱이 이쁘니 재잘거리고 있을 때 텔레비전으로 빙그레 이글스 야구 경기를 보고 계시던 아빠는 손가락으로 안경을 쓰윽 올리셨다.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첫 눈이 올 때까지 남아있었는지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매년 봉숭아물을 들였던 것 같은데 특별히 여덟 살 여름이 기억이 남아있는 건 아빠 때문일 것이다. 엄마가 되고 보니 아이가 기뻐할 만한 일이면 다 해주고 싶고 그 웃는 얼굴 하나 보려고 하는 일들이 꽤 생긴다. 김치 얼룩이 묻은 것처럼 당신 손가락에 봉숭아물이 얼룩덜룩 들었어도 여덟 살 딸내미의 행복한 웃음을 보셨을테고, 첫 눈이 내렸던 그 해 겨울까지 뿌듯하셨을 것이다. 다 큰 어른이 된 지금까지 사진으로 찍어낸 듯 기억에 남아있는 나의 그 여름 날처럼, 내 아이도 할머니 댁에서 물들였던 봉숭아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올 해엔 첫 눈이 빨리 오길, 아이의 소원이 뭔지 그 때 들어봐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