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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구름 Oct 22. 2023

 식초와 노각무침

    어린 날의 여름 식탁


 아파트 숲 사이로 주황빛 노을이 새는 시간, 더운 기운이 한 풀 꺾이면서 아이들에게 최적의 노는 타이밍이 만들어졌다. 여름의 땅거미를 등에 업고 땀을 쏟아가며 친구들과 신나게 친목을 다지고 있으면 저 멀리서 엄마들의 아이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밥 먹어! 빨리 들어와! 목소리는 다 달라도 제 때 밥을 먹이려는 엄마들의 마음은 같았을 것이다.

 주방 작은 창으로 엄마가 여러차례 내 이름을 소리쳐 부르면 꼬질해진 손으로 땀방울을 닦아내고 겨우 발걸음을 돌렸다. 한창 재밌었는데 꼭 엄마는 이럴 때 불러, 불만 가득 뾰로통한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다. 엄마가 지지고 볶은 그 날 저녁 반찬 냄새가 콧 속으로 굽이쳐 흘러들어오면 노느라 잊고 있던 배고픔이 단번에 밀려왔다. 

 

 여름 우리 집 식탁에는 제철 음식이 많이 올라왔다. 그 중에 나는 노각무침을 좋아했다. 장딴지만한 누런 오이를 길게 자르고 소금에 푹 재워 놓은 후, 쓴 맛을 빼기 위해 물로 박박 씻어 꽉 짜내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기억난다. 짠 오이물이 엄마 손가락 사이에서 흐르는걸 보고 있자니 침이 고이는지라 하나는 먹어봐야겠어서 씻고 저녁 먹으라는 잔소리에도 꼼짝 않고 버텼다. 채근하듯 입을 아- 벌렸고, 마지못해 엄마가 입 안에 넣어주면 짭조름한 오이가 싸각싸각 씹히는 여름의 맛이 느껴졌다.

 목욕재계가 끝난 오이에 옷을 입힐 순서. 다진 파마늘, 고춧가루, 설탕, 간장, 들기름을 넣어 무치고 나면 마지막 식초 차례다. 엄마는 무침 요리에 항상 식초를 대량 투하했는데 어떨 때는 냄새가 너무 강하게 들어와 한 입 먹고 켁켁 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더운 여름에는 식초 폭탄 반찬이 또 입맛을 돋우어주는게, 다음 끼니에서도 또 생각이 나는 것이다. 새그러운 식초에 고소한 들기름 향이 퍼지고 솔솔 깨를 뿌려주면 그 냄새만으로도 밥 한 공기는 뚝딱이었다. 길쭉한 늙은 오이 무침이 뭐 그리 맛있는지 동생과 앞다투어 젓가락질을 하면 엄마는 저기 더 만들어놨다며 천천히 먹으라고 웃음 섞인 핀잔을 주었다. 조용히 물 컵을 스윽 밀어주는 아빠의 사랑은 덤이었다.

 얼마 전 시어머님이 노각을 보내주셨다. 마당 한 켠에 텃밭을 마련하여 정성을 다해 여름 열매들을 완성하시어 매 주 우리에게 보내주신다. 재료 손질이 혹여 힘들까 누런 노각 껍질을 벗겨내어 연두빛 알맹이를 국수처럼 잘라주셨다. 비닐 봉지를 열고 숨을 들이켜자 햇볕을 머금고 자라난 원숙한 오이향이 풍겼다. 여름의 냄새였다. 소금을 뿌리고 오이 국수를 꽉 짜냈다. 설레는 마음으로 하나를 집어 씹었는데 웬 걸, 입에 고삼차라도 들어온 냥 쓰디쓴 즙이 터졌다. 에퉤퉤, 당장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설탕 넣었지? 마지막에 식초를 넣어, 많이 넣어도 돼. 그럼 쓴 맛이 사그라들거야. 어차피 시간 지나면 물 빠지면서 신 맛도 좀 빠지니까 괜찮아." 

 제일 중요한 건 역시 식초. 식초병을 기울여 네 바퀴쯤 돌려 뿌렸더니 새콤하다 못 해 쿰쿰한 향이 올라왔다. 조물조물 무쳐 상에 올려놓자 덥다고 소파에 늘어져있던 딸이 냄새를 맡고 어느새 내려와 앉아 먹고 있다. 엄마 말대로 쓴 맛이 고새 좀 빠졌나보다. 연신 노각 무침을 오물거리며 엄지 손가락을 올려 따봉을 만들어내는 아이가, 꼬질한 땀에 절어 엄마에게 오이 국수 한 줄 받아먹었던 어린 날 나와 겹쳐보였다. 외할머니의 여름 식탁을 아이에게 맛보여 준 저녁, 아이는 싸각싸각 오이 씹는 소리를 내며 밥 한 공기 뚝딱 해치웠다. 

 노을이 길게 떨어지는 요즘, 줄넘기 학원에서 열심히 줄을 넘어 땀이 송송 맺힌 딸을 데리고 귀가하면서 우리 집 창문을 올려다 보게 된다. 빨리 들어와, 저녁 먹어! 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것 같다.

오늘도 노각무침을 해먹어볼까. 어린 날의 새콤한 여름 맛이 생각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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