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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구름 Oct 22. 2023

조성모를 좋아했던 엄마 vs
뉴진스를 좋아하는 딸

피는 못 속여

 뉴진스가 데뷔했다. 5명의 긴 생머리 소녀들이 머리칼을 흩날리며 추는 춤과 세련된 멜로디에 많은 사람들이 홀렸다. 풋풋한 어린 소녀들의 모습에 나도 관심이 생겼다. 아이 학원 오가는 길이나 마트 가는 길에 차 안에서 틀어주는 플레이리스트에 뉴진스 노래를 추가했다. 자주 듣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이는 Hype boy에 이어 Ditto, Super shy까지 가사를 줄줄 꿰어 부르게 되었다. 본인이 들리는 대로 부르기 때문에 영어 가사라도 상관없다. 흥얼흥얼 콧소리로 넘기는 구간도 제법 진지하게 멜로디를 따라간다. 각 방송사의 음악 방송 유튜브 채널이 올린 무대 영상을 틀어달라 하고선 뉴진스 언니들을 보고 춤을 따라추며 생애 첫 덕질을 하는 중이다. 신나게 몸을 흔드는 아이를 보며 피는 못 속이는가 싶어 조금 뜨끔하다. 나의 첫 덕질도 철 모르는 어린이였던 시절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요일 늦은 오후, 리모콘 빨간 전원 버튼을 누르면 엉덩이가 퉁퉁했던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팟-하고 켜졌다. 마음이 급해 채널 버튼을 연타하며 5번으로 맞추어 놓고 SBS 인기가요를 기다린다. 다른 프로그램을 보겠다고 리모콘을 찾아 다니는 동생을 모른 척, 소파 밑에 리모콘을 숨겨 놓고 깔고 앉았다. 절대 넘겨줄 수야 없지. 

 지금은 스티븐 유라는 이름이 더 친숙한 유승준이 잠자리 눈알 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나나나'를 노래한다. 노랫소리 보다 팬클럽 함성 소리가 더 커 눈살을 찌푸리고는 춤은 뭐 잘 추네, 팔짱을 끼며 삐딱한 눈으로 곁눈질 한다. "아 리모컨 어디다 놨냐고!" 아직도 찾고 있는 동생의 짜증 섞인 소리에도 태연히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MC들의 가수 소개 멘트가 끝이 나기만 하면 된다. 



나왔다, 우리 성모 오빠!


 1998년 To heaven으로 데뷔한 조성모는 갸냘픈 여린 미성으로 가사 속 하늘에 있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했다. 울먹울먹한 소년의 눈망울로 못 다 이룬 사랑을 그리워하는 그는 발라드의 황태자라는 별명을 얻기 충분했다. 당시 대세였던 강한 남성상을 컨셉으로 잡고 화려한 퍼포먼스와 알아 듣지 못 할 빠른 랩을 하는 1세대 아이돌과는 확연히 다른 노선이었다. 1년 먼저 데뷔하여 대단한 인기 몰이를 하고 있었던 솔로 댄스 가수 유승준과는 얼마 되지 않아 라이벌 구도가 만들어졌던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처음에는 얼굴 없는 가수였다. 이병헌, 김하늘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열연한 뮤직비디오가 유명해지자 사람들은 노래를 부른 가수를 궁금해했다. 아름다운 진가성 목소리와 영화 같은 뮤직비디오에 집중한 마케팅은 먹혀들었고 앨범이 나온지 한 달만에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목소리와 딱 어울리는 미청년 신인에 대중은 열광했고, 열 살 어린이였던 나는 기가 막히게 부합하는 이상형의 현신에 가녀린 그를 지켜줘야겠다며 급속히 빠져들었다. 

 

 아빠는 시장 한 쪽에 자리한 레코드샵에 가끔 우리를 데리고 가셨다. 그 곳에서 X세대 인기가요 테이프를 몇 개 사서 지루한 명절 귀성길, 귀경길에 틀어주시곤 했다.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똥차 프라이드 안에서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 쿨의 운명, 이정현의 와 등 요 몇 년간 유행했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지루함을 날려버렸다.

 그 날도 레코드샵을 지나가고 있었다. 가게 입구에 붙여놓은 수많은 브로마이드 사이로 얼마 전 컴백한 조성모의 3집 앨범 Let me Love 자켓 사진이 보였다. 설에 모아놓은 세뱃돈을 풀 때가 왔다. 집으로 달려와 지갑을 챙겨 바로 테이프를 샀다. 당시에는 스트리밍이라는 개념이 없어 테이프나 CD로 음원 차트 계산을 했는데 성모 오빠의 순위에 일조했다는 것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서 전축 오디오에 테이프를 넣고 재생시켰다. 커다란 스피커 두 개에 피아노의 여린 음계가 또르르 떨어졌다. 뒤이어 시린 듯 애닳은 바이올린 음율이 흐르고 '아시..나요' 목소리가 이어졌다. 청아한 목소리, 역시 조성모였다. 몇 날을 질리도록 들었다. 앨범 사진 겸 가사집에 지문 자국이 묻을까 조심했지만 하도 펼쳐봐서 결국 접는 부분이 너덜해졌던 기억, 앨범을 사고 받은 브로마이드를 방문에 소중히 붙여두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물론 조성모의 몇 안 되는 댄스곡 중 하나였던 다짐을, 동생과 자켓을 펄럭대며 빠라바빠빠빠밤 큰소리로 불러대던 것도 잊을수 없다.



 2020년대를 살아가는 어린이의 첫 덕질 대상인 뉴진스와 90년대 후반을 살았던 어린이의 푹 빠져있었던 첫 가수 조성모. 좋아한다는 그 마음 하나로 유년 시절의 즐거웠던 추억을 가진 딸과 나의 시간은 영원할 것이다. 한 세대를 떠올릴 수 있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 시대를 온전히 내 것으로 영유하는 게 아닐까. 내겐 조성모씨가 'To heaven'으로 데뷔한 98년부터 2003년 '피아노'를 노래했던 그 5년의 시간이 그 시대를 생각나게하는 나만의 문화가 되어있다. 열 살 무렵을 떠올리면 언제나 조성모가, tv 간혹 모습을 드러내는 조성모씨를 보고 있으면 그 당시 어린이와 청소년기의 내가 애쓰지 않아도 엮여 떠오른다. 아이에게는 현재 뉴진스가 그러할테지. 훗날 뉴진스 노래를 우연히 듣게 된다면 엄마와 함께 차 안에서 신나게 따라불렀던 그 어린 시절이 생각날 것이다. 뚱뚱한 브라운관 티비 전원이 팟- 켜지는 것처럼. 


 앞으로 딸이 이어갈 수많은 취향들을 기대한다. 그리고 여지없이 이어질 나의 덕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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