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어릴 때, 자주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갔다. 어떤 날은 아파트 단지를 천천히 걷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조금 멀리 있는 편의점에 가서 간식을 사 오기도 했다. 어떻게 놀아줘야 하는지 잘 모르는 서툰 아빠다 보니, 산책이 아이와 내가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놀이였다. 다행히 아이도 걷는 것을 좋아했다.
아마 세 살쯤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은 앞서 걷던 아이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걷고 있던 나는 혹시 누구와 부딪히진 않을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 급히 뒤쫓아갔다. 차가 다니지 않는 한적한 곳이었지만 아이가 다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얼마 달리지 못하고 휘청이더니 발을 헛디뎌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헐레벌떡 달려가 "서윤아, 괜찮아?"라고 물었다. 하지만 아이는 이미 심통이 날 대로 나서
"아빠 때문이잖아!"라고 소리쳤다.
여느 때 같았으면 엉엉 울었을 텐데, 주저앉아 그대로 있는 걸 보니 단단히 골이 난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이의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짜증은 나는데 그 감정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 괜히 옆에 있는 나에게 화를 내는 모습이 어이없으면서도 귀여웠기 때문이다.
서윤이의 예에서 보듯 사람은 누구나 남 탓을 한다. 어떤 때에는 화가 나고 짜증이 나서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기 싫어 핑계를 대기도 한다. 이렇듯 남을 탓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족이 가진 특성이기 때문에, 자기 수양이 깊은 사람이라고 해도 완전히 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남 탓이 인간의 '종특'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나면 약간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첫 번째 지혜는, 남을 탓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잠시 다른 생각을 하며 시간을 버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실수나 실패를 인정하는 것보다 남을 탓하는 편이 상처도 덜 받고 훨씬 손쉽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시험이나 팀 프로젝트를 망친 뒤에 하는 변명들에서 잘 드러난다. 시험을 망친 사람들은 '문제가 안 배운 데에서 나왔다'고 하거나 '너무 어려웠다'고 하고, 팀 프로젝트를 망친 사람들은 '나는 열심히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안 해서 망쳤다'고 한다.
우리는 그것이 변명이라는 것을 알지만, 정작 남 탓을 하는 순간에는 알아차리기 어렵다. 드라마 <안나>에는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씁니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 대사는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일기장에서조차 본인에게 유리하게 사실을 왜곡하는 인간의 본성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남 탓을 하고 싶고, 내 잘못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도 그 생각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 감정은 어쩌면 나에게 유리하게 각색된 자기 기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며 시간을 버는 편이 낫다. 그렇게 멈추어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것만으로도, 감정에 휩쓸려 저지르는 실수를 줄일 수 있다.
두 번째 지혜는, 화가 난 사람 근처에 가지 않는 것이다. 화가 난 사람은 문제의 원인을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 곁에 있으면, 엉뚱한 원망의 대상이 되기 쉽다. 이런 이유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쁜 소식을 전했다가 화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수없이 전해져 온다.
대표적인 예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전령 이야기다. '사기' 속 불쌍한 전령은 전한의 무제에게 패배의 소식을 전했다가 하옥된다. 과연 전령에게 하옥될 만한 죄가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전령은 단지 나쁜 소식을 전했을 뿐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안토니의 소식을 기다리던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가 옥타비아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자 소식을 전한 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The first bringer of unwelcome news / Hath but a losing office"
(나쁜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하는 자는 손해 보는 자리일 뿐이다.)
그리고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소식을 전한 이에게 화를 퍼붓는다.이번에도 소식을 전한 사람은 아무 잘못이 없다. 잘못이 있다면 화난 사람 곁에 있었다는 것 뿐.
세 번째 지혜는, 다른 사람이 내 탓을 하더라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은 누군가를 탓할 때 옳고 그름을 충분히 따지며 하지 않는다. 대부분 가장 손쉬운 대상에게 책임을 돌린다. 때로는 곁에 있는 사람에게, 또 때로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관계(가족, 친구, 부하 직원)에 있는 사람에게 잘못을 전가하기도 한다.
누군가 내 잘못을 지적하더라도 그 주장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오히려 그 비난은 상대가 가진 불안이나 방어기제에서 비롯된 반응일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 내 탓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신앙을 부정하고 혼란을 일으키는 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갈릴레이의 주장은 과학적 진실에 근거한 것이었고, 그에 대한 비난은 교회가 흔들리는 권위를 지키기 위해 한 방어적 행동이었다. 그런데 만약 갈릴레이가 자신을 향한 비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연구를 부정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오늘날처럼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 콜센터 직원이나 상담원들은 종종 고객의 비난을 듣는다. 하지만 그 비난의 상당수는 고객 자신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콜센터 직원이나 상담원들이 고객의 비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모두 해결하려 든다면 오히려 감정적으로 소진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상대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
서윤이가 "아빠 때문이잖아!!"라고 한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다. 그때 일을 떠올리며 글을 쓰다가 서윤이에게 문득 이야기를 꺼냈다.
"서윤이가 아기였을 때 달리다가 넘어진 적이 있는데, 아빠가 '괜찮아?'라고 물었더니 뭐라고 한 줄 알아?"
"몰라, 뭐라고 했는데?"
"서윤이가 갑자기 '아빠 때문이잖아!!'라고 하는거야!!"
서윤이는 내 말을 듣고 깔깔깔 웃더니, "진짜? 왜 그랬대?"라고 하며 몇 번이나 그 이야기를 다시 들려달라고 했다. 이제 일곱 살이 된 서윤이가 생각해도 그 상황에서 아빠를 탓하는 건 좀 이상하게 느껴졌나 보다. 아이를 키우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남 탓은 미숙함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고. 예전에는 넘어진 뒤 "아빠 때문이잖아!"라고 했던 서윤이가 이제는 "앞으로 조심할 게"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 모두는 평범한 사람이기에, 때때로 남 탓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을 누구에게라도 쏟아내고 싶을 때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남을 탓하는 미숙함이 아니라, 그 미숙함을 인식하고 멈추려는 태도다. 내가 남 탓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다면 그래도 조금은 덜 할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