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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딱 젖고 시작한 스페인 마지막 날 : 스페인 세비야

by 구은서


세비야의 숙소는 에어비앤비로 구했다. 관광 중심지보다는 살짝 거리가 있는 집이었고, 프란치스카라는 할머니가 방 하나를 내어주는 형태였다. 막상 문을 여니 할머니 대신 갈색 피부의 소녀가 나를 맞아주었다. 그녀는 내가 들어가자마자 스마트폰 키보드를 재빠르게 토도도도독 두들겨서 구글번역기를 보여줬다. '안녕하세요. 저는 프란치스카 집에서 집안일을 돕고 있어요. 방을 안내해드릴게요.' 나는 웃으며 예스 하고 졸졸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서도 육성으로 고민하면서 "에-음" 하더니 '여기가 방이에요. 아직 방 정리중인데 거실에서 조금만 기다려주실래요?' 하고 토도도도독 두들겨서 구글번역기를 보여줬다. 그 뒤로도 계속 할 말 있을 때마다 "에-음" 으로 시작해서 번역기를 치는 패턴이 왠지 웃기고 뇌리에 남아서 나중에 나도 모르게 따라하게 되기까지 했다.


다음날 목도 붓고 두통이 있어서 감기에 걸려버렸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기대했던 스페인광장과 미리 시간까지 예약된 알카사르를 위해서는 재바르게 준비해서 나가야했다. 밖으로 나가려는데, 프란치스카 할머니랑 소녀가 나와서 우산을 가리키고 번역기로 비가 오니까 빌려준다고 했다. 나는 이미 우비를 쓴 상태였고 내 우산을 가리키며 우산 있어요! 걱정마요. 하고 씩 웃으며 밖으로 나섰다.


비가 올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현관문을 열어 보니 장대비가 우수수수 쏟아지는 중이었다. 헉. 다시 집으로 들어가고싶은 마음을 꾹 참고 빗속을 걷기 시작했다. 우산은 한없이 가벼워서 쓰나마나였고 우비를 입었는데도 엄청난 비를 통째로 맞는 기분이 들었다. 아파트를 나와서 바로 앞에 있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 이미 신발의 절반이 빗물인 것 같았다. 신발에 물이 이렇게나 차는 건 한국에서 어쩌다 한번 태풍뚫고 출근할때나 겪었던 건데.. 감기에 속도 안좋은걸 참고 겨우 나온건데..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고 어이가 없어서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아니....ㅋㅋㅋ


일단은 고민하다가 스페인광장을 갔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이 있었던 듯한데 폐쇄되어있어서 빙 돌아가야했다. 고생끝에 사람들이 오가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거대한 반원형 건물의 끝없어보이는 회랑이 펼쳐졌다. 와 여기구나. 찬찬히 회랑을 걸어보았다. 비를 피할 수 있어 안도감과 함께 회랑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러나 회색빛 하늘과 채도가 옅어진 바깥을 보며 약간은 착잡한 마음이었다. 플라멩코를 추는 사람들, 정열적인 음악, 따사로운 햇빛과 함께였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그런건 하나도 없고 나쁘지 않지만 어쩐지 쓸쓸한 음악을 연주하는 한 사람만 계단 근처에 있었다. 그럼에도 스페인광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여전히 나를 압도했다. 회랑의 끝까지 쭉 걸으며 감탄하다가 알카사르 예약 시간에 맞춰서 아쉬운 마음으로 떠났다.



알카사르에 갔을 때도 장대비는 계속되었다. 알함브라 궁전을 보고나니 왠지 알카사르는 비슷하거나 덜한 느낌일거 같아 취소하고싶어질 지경이었는데, 알아보니 취소는 안된다고 했다. 그래도 이 티켓을 구하려고 자기 전 새로고침을 몇번이나 했던가... 그래 가보자.


알카사르는 대부분 실내에서 감상했지만 가끔 건물 사이를 지나갈 때는 비를 맞아야했다. 어떤 곳에선 옆에 있던 외국인이 심호흡을 하고 하나둘셋! 한다음에 우다다다 뛰어갔다. 나도 곧이어 뛰어갔다. 내 몫의 심호흡을 대신 해주신 느낌.


예상대로 알카사르는 알함브라 궁전이랑 비슷한 구석이 많았고 비가 와서인지 정원은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게 막아놨다. 딱 하나 대사의 방(Hall of Ambassadors, Salón de Embajadores) 이라는 곳은 인상적이었다. 엄청 높고 둥근 돔으로 된 천장이 있다. 처음 들어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압도될만한. 그래서 여기를 접견실로 썼겠구나 싶었다. 전체적으로 궁전 건축은 하나하나의 요소들이 정교하고 세밀해서 엄청난 노력이 들어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 것 같지만 동시에 화려함을 뽐내지는 않는 느낌이 좋았다.



늦은 오후에는 파리에서 온 마산데라는 친구를 만났다. 'NomadHer'라는 여성 여행메이트 구하는 플랫폼이 있어서 메시지를 주고받게 됐다. 알고보니 그녀는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사람이었고 대학교부터 프랑스로 갔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안되었다고 했고 딱 그 나이의 소녀감성이 있었다. 일상에 대한 질문을 하니 유투브 보고 주말에 팝스타 콘서트 가고 간편식으로 저녁을 때운다고 말해서... 뭐야 서울 사람이랑 완전 똑같잖아..? 라고 생각했다. 공부는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했고 일을 시작하면서 파리에 왔는데, 파리에서 삶의 리듬은 굉장히 빠르다고 했다. 그래도 퍽 적응해서 만족하며 지낸다고.... 나도 3-5년차로 일할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대답했을 것 같다. "서울 완전 적응했고 외롭지도 않아요. 그냥 좀 바쁘네요." 같은 얘기를 누군가에게 했었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열심히 직무 관련 공부도 하고 갓생을 살면서도 그게 당연하고 삶에 활력이 있었는데, 어느 포인트에서 그렇게 지쳐버렸는지 모르겠다. 올해 초에는 "서울 그만 살고싶어요. 답답해요. 쉬고싶어요."가 되어버렸다.


저녁이 되자 비는 그쳤지만 내 발은 여전히 신발 안에서 축축했다. 그래도 그 생경한 풍경 속에서 축축한 발은 드문드문 느껴지는 정도였다. 플라멩코 공연을 당일 오후에 예매하려다가 놓쳐서 밤10시에 보게 된 탓에 시간이 붕 떴다. 다시 한번 스페인광장을 갔다. 야경은 또 색다르게 아름다웠고 사람도 많지 않아서 여유롭게 넓은 공간을 만끽했다.



내가 예매한 플라멩코 공연은 생각보다 소규모였고 관객은 30명정도였다. 줄서서 기다리는동안 앞에 선 이탈리아 여자애랑 이야기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몇개 아는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한국 관련된 유투브를 본다, '서울 마피아'라고 '영국남자' 채널이 하듯이 반대로 한국인들한테 이탈리아음식 먹이는 이탈리아인 유투버가 있다고 했다. 밤이 늦어 폰 배터리가 얼마 안남았고 숙소에 못갈까봐 두려웠다. 폰을 일단 완전 꺼두고 완전 정면 꿀자리에 마침내 앉아서 플라멩코를 봤다.


공연의 등장인물은 5명인데 두명이 노래하고 한명은 기타같이 생긴 무언가를 연주하고 두명이 춤을 췄다. 이것은 단순한 춤이 아니구나 를 공연을 보면서 알게됐다. 판소리처럼 중간중간 서로 추임새도 넣고 즐기면서 연주하고 춤추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리듬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빨라지기도하고, 춤 없이 구슬프게 연주하기도 하고, 흥겹기도 하고 다이나믹해서 잘 모르는데도 한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원래는 스페인에 가면 플라멩코를 원데이클래스 같은걸로 배워보고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춤에 소질은 없지만 재밌을 것 같아서. 어쩌다보니 그냥 공연만 간신히 본거였는데, 너무나 깊어서 원데이클래스로는 인트로도 제대로 못들을 것 같다.




공연이 끝나니 시간이 너무 늦어 발빠르게 움직였다. 배터리도 별로 안남았고, 밤11시가 넘었고, 이 동네 치안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택시 타기엔 너무 아까운 거리라 걸어갔다. 다행히 앞서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결국 다른 길로 빠지고 혼자 남았다. 가로등이 아얘 없어서 손전등을 켜야했던 구간을 제외하면 다행히 걷기에 괜찮았다. 숙소에 들어가 여전히 축축한 신발, 가방과 내용물들을 꺼내 말렸다. 이 축축함에도 불구하고 참 오래도 돌아다녔구나. 그런데 그렇게까지 피곤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았다. 여행의 힘일까.


자기 전 양치하려고 나가니 프란치스카 할머니가 인사를 했다. @#$ㅁㅎ&@! 뭐라 알아듣지 못할 말을 미소지으며 한 다음 손을 모으고 자는 척 할 때 쓰는 포즈를 취하셨다. 아 잘자라는거구나. 언어가 하나도 안통하니 오히려 잘자라는 인사가 더 스윗하게 와닿는다. 화장실이나 문 등 전반적으로 불편한 구석은 많았지만 잠만큼은 안심하고 잘 잤다.





세비야를 다시 간다면

명소

- 스페인광장

- 플라멩코 공연 - 다른 공연도 보고싶다. 마이리얼트립은 예약 결제 다했는데 처리가 바로 되지 않아서 취소해야했음. 공홈에서 직접 예약하자...

맛집

- 없었음 ㅠ


이번에 못한 것

- 강변을 따라 걸어보고 싶었는데 날씨 때문에 실패


처음 계획할 땐 세비야와 그라나다 중 세비야에 더 머물고싶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라나다 4박 세비야 2박을 했다. 그리고 매우 잘한 선택이 됨. 그라나다에 비하면 세비야는 꽤 큰 도시이고 내가 이렇게 관광객 많고 큰 도시에 오래 머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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