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이비자

by 이수현

한국에서 유리에게 연락이 왔다. 유리는 회사에 처음 입사하고 나서 교육을 같이 받던 동기로 여행을 좋아하는 취미가 맞아 함께 자주 여행을 가곤 했었다. 이번 여름휴가로 스페인에 오게 되었다고 시간이 맞으면 함께 이비자 섬에 가자고 했다. 한국에서는 추석이 긴 명절이지만 스페인에서는 그냥 학교에 가야하는 평일이었다. 유리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 광복절 휴가로 일정을 변경해서 가기로 했다. 광복절인 8월 15일은 스페인에서도 성모승천 대축일이란 기념일이라 학교도 쉬어 둘다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숙소와 클럽을 현지에 있는 내가 예약하기로 했다. 열심히 알아보고 저렴하지만 괜찮은 숙소도 예매했다. 비행기 발권까지 마치고 보니 유리랑 의사소통에 오류가 있었다. 추석에 온다는 이야기를 내가 잘 못 알아듣고 8월 15일에 맞춰 숙소와 비행기를 예약한 것이다. 이미 비행기까지 예약했는데 난감하다. 한국에서 오랜만에 친구가 온다고 한 데다가 이비자섬을 함께 즐길 기대에 흥분했었나 보다. 상식적으로 긴 휴가를 낼 수 있는 추석이 아닌 8월 15일에 오긴 힘들었을 텐데 뭐에 쓰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그렇게 덜컥 취소도 안 되는 예약을 해버렸다. 그냥 포기하자니 비행기에 숙소까지 지출을 꽤 감당해야 했다. 고민을 하다 그냥 혼자 가기로 했다. 당시만 해도 친해진 친구도 없었을 때라 같이 여행을 갈 반 친구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환락의 섬 이비자에 홀로 간다니 지금 생각해도 황당하지만 난 그렇게 또 별생각 없이 떠났다.



팔마 대성당



마요르카 공항까지 비행기를 타고 갔다가 마요르카에서 이비자로 페리를 타고 이동하는 여정이었다. 마요르카도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관광지인데 그곳에 혼자가려니 이제껏 혼자 잘 다니던 나도 용기가 없어진다. 숨 한번 크게 쉬고 마요르카 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전체에 혼자 탄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스페인에서는 한국에서보다 혼자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 더 없다. 언젠가 알리칸테 근처 엘체(Elche) 식물원에 혼자 들어가자 입장권을 받던 직원이 혼자 왔냐며 놀라서 두 번이나 물은 적이 있었다. 혼자 여행이 익숙한 나는 그녀가 놀라워하는 것이 더 놀라웠지만 돌아와서 어학원 선생님 디에고에게 물으니 스페인은 보통 여행을 혼자 가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혼자 여행이 익숙하던 나도 마요르카와 이비자는 정말 고난도 코스였다.

알리칸테에서 비행기로 1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 팔마 데 마요르카(Palma de Mallorca)공항에 도착했다. 팔마는 마요르카섬 중 가장 큰 중심지로 공항이나 페리 선착장이 있어 마요르카섬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무조건 팔마를 거쳐야 한다. 팔마에 도착하자마자 소예르(Sóller)로 향했다. 블로그에서 본 소예르까지 가는 나무기차가 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팔마에서 소예르까지 가는 나무기차는 100년도 더 전에 레몬을 운반하던 운송수단이었다는데 지금은 관광용으로만 운행한다. 소예르까지 1시간 정도 걸리고 배차 간격이 꽤 길어 기차역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가기로 했다. 기차역도 그 시대 양식 그대로인 듯 오래된 분위기를 풍긴다.



기차역 끝에 작은 카페테리아에서 보카디요(Bocadillo, 스페인식 샌드위치)와 맥주를 하나 시키고 역사를 바라보며 점심을 먹었다. 맥주의 마지막 모금을 마시고 나니 열차가 도착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좋은 자리에 앉으려 앞 다투어 열차에 올랐지만 혼자인 나는 빈자리 아무곳에나 앉아도 된다. 좌석이 부족할까 걱정할 필요도 없어서 좋다. 나무기차에 앉아 팔마의 풍경을 바라본다. 삐걱대는 소리마저 정겹다. 스페인은 가는 곳마다 비슷한 듯 다른 풍경이 참 재밌다. 알리칸테는 초록빛이 거의 없는 황무지 산이 많은데 마요르카는 푸른 산이 꽤 보인다. 고즈넉한 들판과 농가를 지나고 소예르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려 바로 보이는 소예르 광장에 가니 15세기에 건축되었다는 하얀 성당이 중심지를 지키고 있고 성당 주위로 아기자기한 레스토랑과 기념품 샵들이 들어서 있다. 그 광장에서 다시 나무 트램으로 갈아타고 소예르 항구로 간다.



소예르 나무트램 역시 100년도 넘은 트램인데 소예르 구시가지와 항구를 연결한다. 트램은 기차에 비해 더 천천히 운행하며 앞부분이 주황색으로 칠해져 있어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에 나올 법한 기차의 모습이다. 트램이 지나가면 관광객들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아기자기한 외형 말고 나무 트램의 진짜 매력은 천천히 달리는 열차에 앉아 그림 같은 소예르 해변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걸어가는 관광객들의 걸음 속도와 비슷하게 운행돼서 더운 날씨에 소예르를 구석구석 앉아서 감상할 수 있다. 한여름이라 트램에 앉아 있는데도 햇볕이 뜨겁다. 해변에는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해변 주위로 정원을 가꿔놓은 레스토랑과 수영복과 물놀이 용품을 파는 기념품 상점으로 가득하다. 작은 도시인데 스페인 다른 해변들보다 상점이 다양하다. 중간에는 슈퍼마켓까지 있어 이곳에서 술과 간식거리를 사서 해변으로 가는 관광객들이 많이 보인다.





상점들을 돌아보다 햇빛을 가리려 하얀 밀짚모자를 하나 샀다. 모자가게 할머니는 우아하게 책을 보고 계시다 내게 어울리는 모자를 여럿 추천해주셨다. 모자로도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은 가려지지 않았다. 동화 속 바닷가 마을 같던 소예르는 여기까지만 보기로 하고 버스를 타고 다시 팔마로 돌아왔다. 이제 진짜 이번 여행의 목적지 이비자에 갈 생각에 살짝 긴장이 된다. 팔마로 돌아와 가우디가 건축에 참여했다는 팔마 대성당에서 해지는 노을만 감상하고 바로 목적지인 이비자로 떠났다. 이비자까지는 팔마 항구에서 페리로 4시간 정도 걸렸는데 페리 항구에는 이미 여름휴가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태어나서 처음 타본 페리는 그 규모가 굉장해서 차를 싣고도 객실이 4층까지 되었다. 여름 지중해를 만끽하기 위해 바다를 직접 볼 수 있는 갑판까지 올라갔다. 갑판에는 주전부리와 마실 거리를 파는 매점이 있었고 매점 좌석은 이미 만취한 스페인 사람들과 이비자로 관광을 온 외국인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그 사이에 홀로 버티고 앉아 지중해를 바라보았다. 일행들과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바다를 바라보며 홀로 감상에 젖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클러버들의 성지인 이비자에 혼자 가는데 페리에서 벌써 주눅이 들어서는 안 되었다. 페리에 탄 관광객 모두 환상의 섬 이비자에 간다는 사실에 들떠 약간 흥분된 상태였다. 그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여름의 지중해를 보는 것은 이내 포기하고 실내 객실로 돌아와 창밖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배가 커서인지 물살을 가르는 파도도 없이 바다는 잔잔하고 고요했다. 그렇게 조용한 바다를 바라보다 보니 이비자 항구에 도착했다. 클럽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숙소는 클럽이 모여있는 타운이 아니라 조용한 해변의 산 안토니오 쪽에 예약을 해두었다. 택시를 타고 예약해둔 호텔로 찾아가니 하필이면 오늘 호텔 욕실의 배수가 고장이 나 다른 호텔로 옮겨주겠다고 했다. 캐리어를 끌고 한참 올라가야했지만 새로 옮겨준 호텔이 기존에 예약했던 곳보다 훨씬 좋다. 방도 더 크고 창문으로 수영장이 보인다. 클럽에 가기 전 여유를 즐기려는 듯 젊은 외국인들이 한가롭게 수영을 하고 있다.





동양인은 호텔 전체에 나밖에 없었다. 한국인들은 이비자를 많이 방문했지만 대부분 클럽과 선상파티를 목적으로 여행을 오기 때문에 이렇게 한적한 해변의 호텔에서는 잘 볼 수 없었다. 이비자는 클럽으로도 유명하지만 신혼여행으로 올만큼 아름다운 해변 휴양지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외곽 해변 근처에도 괜찮은 숙소가 많다. 호텔에 왔는데 수영장은 포기할 수 없어 수영을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내려갔다. 동양인 혼자 수영장에 앉아 발만 담그고 있으니 모두들 신기하게 쳐다보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비치의자에 누워 책을 읽고 맥주 한 잔을 마셨다. 페리를 타고 캐리어를 끌고 이곳까지 온 고단함이 싹 풀리는 것 같다. 아무렇지 않게 내 여유를 즐기자 주위 사람들도 더 이상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게 수영장에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의 풍경에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밤에는 클럽에 한번 가보기로 했다. 이비자에서는 클럽마다 호텔 전역에 버스를 운행해서 편하게 클럽까지 관광객을 태워다주었다. 그런 버스들을 클럽버스라 부른다. 애석하게도 내가 묵던 호텔은 타운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클럽버스가 호텔까지 오지 않았다. 타운까지 일반버스를 타고 가서 인터넷 카페에서 구한 동행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한국에서도 클럽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데다 클럽이란 곳을 혼자가기에는 겁이 나서 인터넷 카페에서 동행을 구한 상태였다. 스페인 여행 카페에는 이비자 클럽을 갈 동행을 구하는 글이 넘쳐났다. 클럽마다 음악과 콘셉트가 다양해서 특정 클럽과 시간을 올리면 일정이 맞는 한국인끼리 모여서 클럽을 가는 것 같았다. 이곳에 오기 전 예매해뒀던 클럽의 동행을 구하는 글이 카페에 올라왔고 일행들이 모여 같이가기로 했다.



만나서 보니 혼자 온 한국인들이 많았다. 친구와 함께 여행을 왔다가 친구와 클럽 취향이 달라 서로 각자 취향에 맞는 클럽에 따로 가기로 한 친구도 있었고 그냥 혼자 여행을 온 사람도 있었다. 다 모이니 8명 남짓이었는데 동행글을 올린 친구는 한달째 이비자에 머물며 매일밤 클럽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본인에게 입장권이 많으니 저렴한 가격에 넘기겠다고 했고 실제로 내가 낸 가격의 절반수준인 20유로에 입장권을 팔았다. 한참 성수기인 여름휴가철이라 입장도 줄을 서서해야 했다. 긴 줄을 대기하고 있는데 건장한 체격의 가드가 어디에서 왔냐고 우리에게 말을 건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가 이곳에서 오래 근무했지만 한국인이 최고라며 엄지를 척 들어올린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일본은 별로란다. 그말을 듣자마자 한국인들이 정말 이곳을 많이 다녀갔구나 싶었다. 한국이 왜 좋냐고 물었더니 한국인들이 정말 잘 논다고 했다. 이비자에서도 한국인의 흥을 인정받은 것 같다. 그렇게 흑인 가드의 칭찬을 들으며 클럽에 입장했다. 시끄러운 음악이 나오고 사람들은 춤을 추고 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다. 클럽이 너무 넓어 어디가 어딘지도 잘 모르겠다. 세상 구경 처음 나온 사람처럼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과 자꾸 부딪치는 것이 영 불편하다. 같이 온 일행들을 보니 벌써 음악에 몸을 맞기고 춤을 추고 있다. 주위 사람들과 군무를 추기도 하고 정말 잘 논다. 주위에 외국인들은 술병을 들고 기웃거리고 춤도 잘 추는 것 같지 않은데 한국인들은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티가 났다. 들어오기 전 가드가 한국인 최고라고 엄지를 들어보이던 것이 다시 떠올랐다. 어디든 한국인들이 노는 장소는 분위기가 확 살아났다. 오늘 동행글을 올린 친구는 슬쩍슬쩍 눈치를 보며 춤을 추는 외국인의 손을 이끌고 같이 춤을 추기도 하고 분위기를 이끌었다. 같이 어울리며 춤을 추다보니 밴드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전자 바이올리니스트가 존 레전드(John Legend)의 All of me를 연주하는데 유명 가수 콘서트장에 온것처럼 무대가 제법 근사하다. 이비자 클럽에 세계 유명 음악가들이 모인다던데 정말 인것 같았다. 공연이 끝나고 이번에는 DJ가 나왔는데 패리스 힐튼이다. 패리스 힐튼을 눈 앞에서 보는 게 신기하다. 단상 위에 분홍색 옷을 입고 서있는 그녀는 너무 예뻤지만 DJ로서 선곡 능력은 영 아니었다. 혼자 즐거운 DJ와 유명인사에 즐거운 관객들의 시간이 지나가고 이 클럽의 시그니처인 버블파티가 시작되었다. 비눗방울 기계를 펑펑 터트리며 공중에 쏘고 음악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즐거워했는데 나는 뭔가 계속 불편했다. 음악은 너무 시끄러웠고 술 취한 사람들의 스킨십도 불쾌했다. 특히 뭔가 동양인 여자에게 더 심한 것 같은 불쾌한 접촉이 견디기 힘들었고 마약을 하는 듯한 서양인들과 마리화나 냄새도 싫었다. 내가 클럽이 맞지 않는 보수적인 여자란 것을 이비자에 가서 깨달았다. 비싼돈을 주고 남들의 버킷리스트일지도 모르는 이비자 클럽에 왔지만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일행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어두운 밤 버스정류장을 찾아 헤매는 데 클럽 안에서 봤던 만취한 스페인 청년이 친절히 길을 알려준다. 그리고는 만원 버스 안에서도 친절히 길을 터주고 내릴 정류장까지 알려줬다. 클럽에서 보던 모습과는 달리 수줍고 정중하다. 낯설다. 클럽이란 곳은 수줍은 청년도 행패부리는 진상으로 바꿔놓는 곳일까 싶다. 그래도 청년덕분에 무사히 호텔에 도착해 방에 누웠다. 시끄러운 스피커 소리에 아직도 귀가 먹먹하다. 클럽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유리와 함께 했더라도 클럽은 내 적성과는 맞지 않는 곳이었다. 잠이 들었고 다음날 늦게 나가 해변으로 갔다.


하늘이 너무 파래서 물감도 아니고 컴퓨터 화면 색상표를 보는 것 같다. 클럽에서 노느라 지쳐 잠이 든것인지 해변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파도도 없는 조용하고 파란 바다가 좋아 모래위에 몇시간째 누워 있었다. 아무래도 내 취향은 시끄러운 클럽보다는 조용한 바다이다. 이비자의 바다는 상상속 여름 바다의 정석이었다. 유리와 같이 왔었더라면 이비자 클럽이 좀 더 좋았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홀로 온 이비자도 좋았다. 하지만 같이 온 이비자가 더 좋았을 것이다. 이 파란 바다와 아름다운 섬을 함께 누릴 때 더 아름다울 것 같았다. 다음에는 꼭 누군가와 이비자에 휴양하러 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알리칸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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