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나라 스페인이라는 명성에 맞게 하루 종일 해와 함께 하는 느낌이다. 여름의 스페인은 해가 지지 않는다. 한 여름에는 새벽 5시에 해가 떠서 밤 10시가 넘어야 들어가기 때문에 하루가 정말 길다. 하루가 길어서 일까 이 나라 사람들 무슨 일이든 여유롭다. 지금 못한 일은 나중에 하면 된다.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 아침에 못한 일은 오후에 하면 되고 오후에 못 한일은 아주 긴 밤에 하면 되니 조급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하루가 천천히 돌아간다. 아침에 스페인은 모두가 잠들어 있는 것 같다. 다들 느지막이 일어나 늦은 점심을 먹고 밤을 즐긴다. 태생적으로 아침형 인간이었던 나는 이런 시간 패턴의 적응이 힘들었다. 물론 직장이나 학교는 다른 여느 나라들처럼 9시나 10시부터 시작했지만 점심은 2시 이후에 먹었다. 학교 선생님들을 봐도 대부분 식사시간이 불규칙했다. 한국처럼 12시가 점심시간 이런 개념이 없는 것 같았다. 대개 2시나 3시에 늦은 점심을 먹고 퇴근하고 한참 후인 밤 10시쯤 저녁을 먹는다. 아침은 과일이나 머핀, 커피 등을 가볍게 먹거나 생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점심은 샌드위치나 간단한 보카디요(bocadillo)와 과일 등을 커피와 함께 먹고 저녁은 하루 종일 못 먹는 것들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아주 푸짐하게 먹었다. 10시에 시작한 저녁식사는 자정까지 이어졌다. 저녁은 가족들과 함께 먹는 것이 전통이지만 지인이나 친구들과 함께 외식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레스토랑이 즐비한 알리칸테 대성당 근처의 거리에 가면 밤 12시가 넘어서까지 항상 노상 테이블에 앉아 저녁 만찬을 즐기고 있는 스페인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조용한 성당과 어울리지 않게 그 거리는 각종 바와 식당으로 가득 차 있고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그릇에 나이프와 포크가 부딪치는 소리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웃음소리와 뒤섞이고 고소한 올리브유 냄새와 찬 맥주잔에 흐르는 물방울, 반쯤 담긴 와인 잔, 그리고 애정이 담긴 눈빛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스페인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거리는 성당이 있기에 가장 알맞은 자리였다. 예수님이 오신다면 이 거리에 같이 앉아 이 즐거운 사람들과 소박한 농담을 하며 와인을 한 잔 하시지 않을까.
성당 바로 아래 골목에는 스페인식 아이스크림 헤라도(gerado)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헤라도는 이탈리아 젤라또 못지않게 맛있었는데 아이스크림보다는 조금 더 진한 맛에 식감이 쫀득했다. 여름밤에 2.5유로짜리 리소(riso 쌀) 맛 헤라도를 하나 들고 대성당 벽 앞에 앉아서 만찬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는 시간이 즐거웠다. 나 역시 근처 바(bar)에서 마신 모히또에 취해 벌게진 얼굴로 차가운 헤라도를 베어 물고 엉터리 스페인어로 친구와 의미 없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그 거리의 일원이 되었다. 그렇게 밤은 계속되었다. 그 거리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나오는 포스티게(Posrigue) 해변에도 사람이 가득했다. 해변에 들어선 가로등 밑에서 비치 발리볼을 하는 사람들, 바닷가 근처 식당에서 맥주나 와인 한 잔을 시키고 앉아있는 이들, 산책을 나온 가족들까지 낮의 바다와는 다른 활력이 느껴졌다. 주택가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리는 가족들의 수다소리도 거리를 가득 메웠다. 온 가족이 모여 저녁을 준비하는 소리 혹은 저녁을 먹으며 서로 각자의 이야기하는 목소리와 틀어 놓은 TV 소리가 섞여 거리는 밤에도 항상 거리는 소란했다. 10시가 지났지만 아직 해가 지지 않는 거리를 걸을 때도 있었다. 밤 산책은 집에서 출발해 대성당 거리를 지나 해변으로 가서 밤의 모래사장을 걷다 맥도날드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들고 해변 벤치에 앉아 밤바다 파도 소리를 듣다 다시 조용한 주택가 창문으로 들려오는 티비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났다.
스페인 학생들의 밤은 보통 사람의 밤보다 더 길었다. 대학생 친구들은 별다른 일이 없어도 새벽 3시나 4시 쯤 잠이 들었다. 수업 시간이 특별히 늦은 것은 아니었지만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서 늦은 저녁을 먹고 인터넷이나 티비를 보며 각자 취미생활을 하다 새벽에 잠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약속은 저녁 이후였다. 8시 쯤 씨엔 몬타디토(cien montaditos)에 모여 몬타디토 몇 개와 1유로짜리 상그리아를 시키고 수다를 떨었다. 클럽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새벽 까지 음주가무를 즐기기도 했다. 시끄러운 음악을 즐기지 않아 알리칸테에서는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꽤 여러 곳이 있는 듯 했다. 호기심에 몇 번 다녀와 본 같은 반 친구들 말에 의하면 한국 클럽에 비해 규모도 작고 음악도 좋지 않다고 했다. 그냥 유행이 지난 음악을 틀어놓고 춤추는 사람 몇 명에 얌전히 술 마시는 게 다라고 실망이라는 반응이었다. 당시 강남스타일 노래가 세계적인 열풍을 끈 이후였는데 여전히 스페인 클럽에서도 자주 나오는 노래라고 했다. 클럽 마니아였던 같은 반 친구 유스케는 강남스타일이 나오면 클럽 모두가 모여 말춤을 춘다며 한국인은 말춤을 더 잘 추는지 물었다. 그런 클럽이라도 큰 즐거움이었는지 말라가로 가는 새벽버스를 타러 4시경 지나가는 클럽 근처 거리에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누워있는 10대 청소년들이 많이 보였다. 그들에게 밤은 좀 더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밤에 비하면 낮은 조금 더 차분했다. 더운 날씨에 모두가 지쳐 시계바늘 조차 느릿느릿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낮은 밤을 위한 준비기간 이었다. 모두들 학교나 사무실에 있는지 거리는 텅 비어 있다. 2~3시 쯤 되면 태양은 위력을 자랑하는 강렬한 햇볕을 내려쬐었고 그 햇볕을 이길 수 없는 사람들은 모두 다 건물 안으로 숨었다. 체력을 비축해두어야 한다. 시에스타가 왜 생겼는지 알 것만 같다. 에어컨이 없는 건물 안에서는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소파에 누워 티브이를 보거나 선풍기를 틀어놓고 잠을 자기도 했다. 조금 더위가 덜한 날은 미뤄둔 숙제를 하거나 집안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6시가 넘으면 되면 다시 거리가 시끄러워졌다. 퇴근하는 사람들과 함께 저녁 먹을 장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서는 주부들 혹은 친구들을 만나러 공원에 가는 아이들 소리가 다시 거리에서 들려왔다. 한국에서는 퇴근을 하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며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지만 스페인은 아직 한참 낮이었다. 바닷가에는 잠시 기운을 빼고 있는 태양을 피해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한낮에 비해 바람도 좀 선선해 졌다. 다시 사람들로 가득찬 바다에서 어린이들은 아빠와 모래성을 쌓고 노인들은 수영복을 입고 해변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카드게임을 했다. 관광객들은 근처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그들을 바라봤다. 모래사장 위에 아이들이 몇개의 모래성을 쌓았지만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마트에는 세일을 외쳐대는 상인들과 반찬거리를 고민하는 주부들이 가득했다. 그 틈에 끼어 나도 오늘 저녁을 뭘 먹을까 고민하며 세일 품목들을 살핀다. 바게트 빵과 함께 먹을 치즈, 토마토, 냉동피자 등을 사서 나온다. 집에 돌아와 저녁준비를 한다. 벌써 8시지만 주방은 나 홀로다. 다들 저녁을 스페인 시간에 맞춰 먹느라 그렇다. 사 온 냉동피자에 맥주 하나를 따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했다. 9시가 넘었지만 아직도 깜깜하지는 않다. 소화를 시킬 겸 밤 산책을 나선다. 한참을 걷고 나서 집에 돌아오니 10시가 넘었다. 룸메이트는 지금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 스페인의 밤이 다시 시작된다. 열어놓은 창문 밖에서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이 들어온다. 그리고 저녁을 즐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함께 들어온다. 그렇게 알리칸테에서의 나의 여름도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