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 되고 벌써 알리칸테에 온 지도 3개월이 지났다. 집을 새로 알아봐야 한다. 애초 계약기간이 지나고 계약을 연장하는 대신 이사를 나가기로 했다. 아직 사람들이 하는 말에 반도 못 알아듣는데 새로운 집을 구해 이사를 하려니 눈앞이 캄캄하다. 집도 어찌 구해야 할지 모르겠고 외국인인 내가 사기라도 당하는 것이 아닐지 걱정이 한가득이다. 이사 나가기 한 달 전부터 밥이 먹히지 않을 만큼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비싼 월세와 집주인, 최악의 룸메이트를 생각하면 꼭 나가야 했다.
내 첫 룸메이트는 일본인 여자애였다. 까만 피부에 꾸미는 것을 좋아하던 23살 대학생이었던 그녀는 스페인어가 유창했다. 첫날 먼저 살았던 세입자로서 집안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주며 지켜야할 규칙에 대해 설명해줬다. 친절한 듯 하면서 단호한 그녀는 내가 생각하던 일본인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그곳에서 지낸지 꽤 오래되었던 그녀는 친구도 많고 약속도 많았다. 집에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고 나도 가능한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룸메이트였다. 하지만 일본인에 대한 편견을 깨준 친구이기도 했다. 그녀는 매일 파티와 약속으로 집에 있는 일이 잦지 않았지만 설거지를 하지 않았다. 같이 쓰는 공용 냄비에 밥을 해놓고 물에 담가 둔 채 설거지하지 않고 일주일 간 여행을 가기도 했다. 몇 번 이야기를 해보아도 고쳐지지 않은 통에 나중에는 그냥 포기하고 내가 설거지를 해 그릇을 사용했다. 새벽에 내 방 옆 세탁기를 돌리기도 하고 친구를 초대해 파티를 벌이기도 해 시끄러운 소음에 자주 잠을 깨곤 했다. 처음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살아보려니 불편한 점이 많았다. 내 첫 룸메이트는 내가 여름방학을 맞이해 북유럽으로 떠난 그즈음 일본으로 돌아갔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보니 룸메이트가 바뀌어 있었다. 주말 아침에 집주인은 예민해 보이는 덴마크 여자애 하나와 그 엄마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나는 그날 아침 북유럽 여행에서 알리칸테로 돌아온 직후였고 그 사실을 이미 집주인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인 룸메이트가 설거지와 청소를 하나도 해놓지 않고 떠난 것이었다. 집주인은 지저분한 주방에 대해 나에게 잔소리를 해댔고 나도 참을 수 없어 내가 일주일 넘게 여행을 갔다 지금 돌아온 걸 알지 않느냐며 따졌다. 그랬더니 앞으로도 깨끗이 정돈되었는지 감시하러 올 거라며 나에게 엄포를 놓았다. 새로 들어온 그 룸메이트의 엄마는 그곳에서 2주를 더 함께 머물렀다. 스페인어는 거의 하지 못하는 듯했고 집에 불만이 있었는지 엄마 앞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에라스무스로 낯선 타국에서 혼자 외로워하는 것 같아 몇 번 말도 붙여보았지만 대답도 잘 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학교에서 몇 번 마주쳤지만 다른 덴마크 친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것 같았다. 그 집에서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아무튼 나가기로 결심을 하고 제일 먼저 이 집을 소개해줬던 어학원의 부동산 부서에 집을 구해줄 수 있냐고 문의했다. 담당 직원은 지금은 성수기라 학교에 나온 중개매물이 모두 계약된 상태이며 기다려도 집이 나올지 확답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집을 구하던 시기가 8월로 방학을 맞이한 학생들이 대거 알리칸테로 들어와 수요가 많아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한국 블로그를 열심히 찾아보니 근처 부동산 중개소를 통해 집을 구한 사례가 많이 보였다. 중앙시장 근처에서 부동산 영업소를 지나가다 몇 번 본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안 가본 부동산에서 집을 구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일반 회화도 못 알아들어서 헤매는데 어려운 부동산 용어를 알아듣고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외국인이라고 무시하고 사기를 치면 어쩌나란 생각에 부동산 앞을 서성이기만 하다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밤에 잠도 오지 않았다. 이미 지금 집주인에게는 이사를 나가겠다고 통보를 했는데 이러다 정말 길가에서 노숙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어 매일 한국 블로그와 스페인에서 집을 구하는 방법을 검색했다. 최후의 방안으로 장기 에어비앤비를 신청해야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한 달 전에 한국에서 어학원에 들어왔던 옆반 소연이가 살던 집에 이번에 방이 하나 비게 되어 혹시 그 방이 계약이 가능한지 물어봐 주겠다고 한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다. 5명의 학생들이 셰어하여 살고 있는 그 집은 공과금을 포함해 월세 250유로로 알리칸테 중심지에서 한 블록 떨어져 있어 위치도 괜찮았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것이 아니면 나는 다른 대안도 없었다. 현재 살고 있는 집과 비교해서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집에 에어컨도 없고 인원도 더 늘어난 집이지만 그저 집을 무사히 구했다는 생각에 모든 것이 감사했다. 게다가 한국인 동생이 함께 살고 있으니 서로 의지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소연이의 도움을 받아 부동산을 통하지 않고 집을 계약할 수 있었다.
새 집주인인 Alvaro(알바로)는 내가 살던 집 외에도 중앙시장 근처에 방 3개짜리 집과 알리칸테 지역에 집을 여러 채 소유하고 있었다. 중앙시장 근처에 있던 집은 방 3개를 모두 한국인 유학생들이 렌트해서 생활하고 있었고 나머지 집들 모두 에라스무스로 알리칸테에 오거나 어학연수를 하러 이곳에 머무는 학생들에게 빌려주고 있는 건물주였다. 4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그는 그렇게 많은 집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사계절 내내 항상 같은 옷을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한 달에 한 번 집세를 받으러 집에 올 때면 항상 바이크 모자를 들고 낡아서 다 헤진 소매의 가죽점퍼를 입고 나타나 집세를 받고 영수증을 적어주고 떠났다. 특별히 친절하지는 않았지만 전 집주인에 비해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집세를 받으러 오기 전 미리 문자로 방문 시간을 알리고 그 시간에 집세를 받아들고 영수증까지 끊어줬다. 청소부도 고용해 주방과 욕실 같은 공용 공간도 주기적으로 청소를 해줬다. 따로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 편리했다. 스페인을 떠나는 날까지 나는 그렇게 알바로의 집에서 별 불편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이사를 나오는 날 흠집을 잡으려 혈안이 되어서 침대 밑의 먼지를 발견하고 보증금에서 20유로를 떼고 돌려줄 만큼 돈에 민감한 사람이었지만 급하게 구한 집에서 그 정도 조건으로 살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그 돈은 알바로에게 팁으로 주는 셈 치기로 했다.
그 집에서는 나를 포함해서 모두 5명이 살았다. 문을 열고 바로 보이는 좌측 방은 내가 사용하였고 내 방 바로 옆에는 독일인 맷(Matt), 내 방의 맞은편에는 소연이의 방이 있었다. 그 옆으로 화장실 겸 욕실이 2개가 붙어 있었고 화장실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공용 주방이 있고 주방 근처 2개의 방엔 아일랜드 남학생 바라(Barra)와 알리칸테로 돈을 벌러 온 이탈리아 여학생 나탈리아(Natalia)가 살았다, 주방 옆에 난 쪽문을 열면 뻥 뚫린 중정이 있고 쪽문 뒤에 조그마한 공간에 세탁기와 빨랫줄이 있어 빨래를 널 때면 아래층 이웃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룸메이트들은 모두 서로의 생활을 존중하며 조용히 지냈다. 말하지 않아도 눈치껏 샤워실 사용 순번을 지켰고 세탁기도 빈 시간을 이용해 사용했다. 다들 좋은 친구들이었다. 그 집의 질서반장은 옆방에 살던 독일인 맷이었다. 욕실이 더러우면 깨끗이 사용하라고 각 방에 노크를 하고 경고를 했다. 공용 쓰레기봉투와 주방 세제 등을 사기위해 한 달에 5유로씩 모으기로 했다며 집기가 떨어지면 주방 깡통에서 돈을 꺼내 각자 알아서 사오고 영수증을 넣어두면 된다고 안내를 해주었다. 건축학을 공부하는 학생인 바라는 에라스무스로 스페인에 왔는데 그 나이 또래 아일랜드인답게 밤 문화와 마약을 즐겼다. 그래서 집에 있는 동안에 그는 늦게까지 잠만 잤다. 나탈리아는 이곳에 일자리를 구해서 왔다고 했다. 주중에 일하는 그녀는 항상 집에 없었는데 착하고 깔끔한 그녀는 항상 더러워진 주방과 욕실을 항상 청소해 주었다. 주말에는 나탈리아 역시 한껏 치장하고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가느라 얼굴 볼 일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집을 내게 소개해 준 한국인 동생 소연이가 내 룸메이트였다. 소연이 역시 착하고 깔끔하고 무던한 아이였다. 웃음이 많아 항상 방긋 웃고 있었던 그녀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언니였음에도 나를 잘 챙겨주었다. 엘리베이터와 에어컨은 없었지만 괜찮은 룸메이트들이 있었고 방안의 가구들도 제법 쓸만했다. 그렇게 두 번째 집에서 좋은 룸메이트와 나는 가을을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