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호수, 토레비에하

by 이수현

한 계절을 보내고 나니 이곳에 사는 것도 제법 익숙해지고 날씨가 선선해 돌아다닐 맛이 났다. 반 친구들과도 가까워져서 주말마다 함께 근교로 여행을 다니곤 했다. 그래서 내게는 여름의 스페인보다 가을의 스페인이 조금은 더 편하고 익숙한 느낌이다.



알리칸테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진 곳에 토레비에하(Torrevieja)라는 도시가 있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가면 되는 이 도시에는 염분으로 인하여 호수 빛깔이 핑크색을 띠는 핑크 호수가 유명하다. 스페인어로는 ‘Laguna Rosa’라고 하는 핑크 호수는 핑크빛 호수에서 수영을 하거나 일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지 다녀온 블로거의 글이 많이 눈에 띈다. 핑크 호수라는 이름 자체가 로맨틱하지 않은가. 핑크빛 호수에서 찍은 사진은 여러모로 인스타 그램에 올리기 적당해서 최근에는 이 호수만을 방문하기 위해 알리칸테에 오는 한국인 관광객도 많은 듯했다.


https://goo.gl/maps/RN2Hpair62ucMrei8


알리칸테에서 토레비에하에 가기 위해서는 기차역 바로 근처의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거나 알리칸테 공항에서 바로 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 다만 버스정류장에서 호수까지는 한참을 가야 하는데 호수가 관광지처럼 정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입구를 찾기 힘든 데다 호수에 직접 가는 교통수단도 없어 우리는 보통 버스정류장에서 호수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토레비에하는 러시아인들이 많이 사는 도시이기도 하다. 아나스타샤(Anastasia)의 말에 따르면 오래전부터 러시아인들이 많이 정착했던 곳으로 바닷가 주위에 별장을 하나씩 구입해 여름휴가를 오는 러시아인들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러시아 식료품 가게나 마켓이 있고 커뮤니티도 있어 가끔 서로의 집에서 파티를 열기도 한다고 했다. 아나스타샤 역시 토레비에하에 있는 부모님의 아파트에 머물고 있었다. 아파트는 그녀의 가족들이 여름휴가를 지내기 위해 구입했는데 지금은 아나스타샤가 혼자 머물며 살고 있었다. 그녀는 핑크 호수와 토레비에하 해변의 중간에 위치한 집에 우리를 초대했다. 핑크 호수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와 각자 나라 음식을 요리해서 먹고 근처 해변에서 마무리하는 일정이다. 학교에서 토레비에하까지는 아나스타샤와 같은 동네에 사는 옆반 러시아 친구 레오(Leo)가 차로 데려다주었다.



실제로 본 호수는 필터로 보정을 한 사진과는 많이 달랐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 주위에 건물이 없어 온통 호수의 핑크빛에 둘러 쌓여 있다. 호수가 꽤나 넓어 주위에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끼리 동화 속 나라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스페인이 아닌 유우니 소금광산에 온 것 같은 기분도 들어 이국적이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유명한 호수를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의지는 없는 것 같다. 호수 주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이 황량해서 버려진 도시 같다. 이정표도 없고 음료나 간단한 간식을 파는 키오스코(quiosco)도 없다. 벤치나 파라솔도 없이 호수 하나가 덜렁 있는 느낌이다. 레오의 조언대로 마실 물과 수건을 준비해오길 잘했다. 하지만 세계에 7개밖에 없다는 핑크 호수가 이곳에 있다. 유럽권에서는 유일하게 스페인에만 있다고 한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곳은 방문할 가치가 있다.


핑크 호수는 여럿이서 보는 것이 더 아름답다. 우리들뿐인 호수에는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로 가득 차 있다. 한국인 친구 H는 해수욕을 하겠다며 수영복을 챙겨 왔다. 실제로는 수면이 얕아 수영은 불가능하고 호숫물에 소금기가 많아 사해처럼 부유해서 다닐 수 있다. 하지만 물에 오랜 시간 들어가 있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주변 환경이나 물이 깨끗하지 않은 데다가 근처에 샤워시설도 없기 때문이다. H는 수영을 한 다음날 피부에 발진이 나서 병원 응급실에 다녀오기도 했다.


해 질 녘이면 핑크빛 호수와 노을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던데 아쉽게도 호수에서 해가 지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노을로 붉은빛 하늘과 붉은빛 호수가 경계를 알 수 없어지는 그 아름다운 광경도 보고 싶었지만 아나스타샤 집에서 먹을 저녁이 더 기대가 되었다. 집까지는 다시 레오가 태워다 주었다. 집은 아나스타샤처럼 사랑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방 두 개와 거실, 주방이 있었고 해가 지는 해변이 보이는 테라스도 있었다. 테라스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저녁을 먹기로 했다. 집주인 아나스타샤는 요구르트 소스를 뿌린 러시아식 팬케이크와 홍차를 준비해놓았다. 요리에 능숙한 중국인 친구 틴틴은 볶음밥과 완자탕을 뚝딱 해내고 한국인 친구들은 김밥과 고추장 삼겹살을 요리해서 차려놓으니 한상 가득이다. 어울리지 않을 듯한 요리들이 묘하게 어울린다. 같이 모여 있는 우리 같다. 세계 요리를 먹으며 바라보는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하늘이 아름다워 핑크 호수에서 보지 못한 노을의 아쉬움을 상쇄한다. 사랑스럽고 재능 많은 아나스타샤가 우쿨렐레를 연주해 줬다. 알지 못하는 러시아 노래와 스페인 국민가수인 엔리케 이글레시아의 노래에 맞춰 우리는 춤을 췄다. 밥 먹은 것을 소화시키려는 듯 한바탕 춤을 추던 우리는 이제 마지막 코스인 해변으로 나왔다.


알리칸테 해변과는 다른 조용한 마을의 바다다. 특별한 것은 없지만 유명한 해수욕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요함과 여유로움이 있다. 그 바다도 우리의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토레비에하에 방문하게 된다면 핑크 호수와 함께 주위 바다도 들러보길 바란다. 그곳에서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지중해를 만날 수 있다.



가을은 짧지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다. 선선한 바람과 시원한 날씨, 적당한 햇빛에 야외활동을 하기 최상의 조건인 계절. 익숙한 친구들과 익숙한 이곳 스페인에서 그 계절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그렇게 또 한 계절이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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