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수현 Oct 06. 2021

스페인의 겨울도 춥다


보통 밤 10시까지 밝았던 해가 점점 짧아지기 시작했고 따가웠던 햇볕도 그 맹렬함이 사그라져갔다. 아이스커피 대신 따뜻한 커피가 생각나고 아침에 등굣길에는 입김이 나오기도 했다. 옷 가게 쇼윈도엔 점퍼나 카디건이 걸렸고 추위에 두꺼운 옷을 껴입은 사람들이 어깨를 구부정하게 걷기 시작했다. 겨울이 온 것이다.



낯설었다. 스페인의 겨울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한 번도 스페인의 겨울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물론 이 나라도 사계절이 있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지만 스페인은 겨울이라는 단어가 안 어울리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겨울이 왔다.


인터넷에서 알리칸테 기후를 찾아보면 ‘계절 간 온도 변화도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 최저기온이 2°C 아래로 내려가는 일은 거의 없다. 눈도 오지 않는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심지어 가로수의 오렌지는 아직도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한국의 겨울처럼 롱 패딩이나 파카를 입을 필요는 없다. 그런데 왜인지 너무 춥다.


밖에서의 추위도 힘들었지만  안에서의 추위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스페인에서 겨울에 추위 때문에 고생할 줄은 정말 몰랐다. 한국의 온돌과 찜질방이 너무도 생각나는 날씨였다. 당시 살던  바닥은 타일로 되어 있어 방에 있으면 바닥의 냉기가 온전히 몸으로 전해져 왔다. 벽에서도 바람이 들어오는  같았다. 발코니  창문은 유리창 없이 나무 문으로  덮여있어 창문을 통해서도 바람이 들어왔다. 세찬 바람에 나무 문이 흔들리는 소리에 잠이 깨기도 했다. 가끔씩 한국에서 입던  패딩이 그리웠다.




선생님 설명으로는 보통 스페인은 집을 지을  더위를 대비해 벽을 바람이  통하는 자재로 짓는다고 한다. 그래서 여름에는 바람이 벽에서 불어와  안에서 순환해 시원하지만 겨울에도 바람이 들어와 방한 대비를 해야 한단다. 

다행히 집에 집주인이 가져다 놓은 두꺼운 이불이 하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Plaza mar2 대형마트에 전기장판을 판다는 이야기를 한국인 친구로부터 듣고 당장 사러 가기로 했다.



 스페인어로 전기장판은 Almohadilla eléctrica라고 부른다. 넓은 매장에서 알모아디야 일릭트라카를 찾아 헤매다 전자제품 코너에서 전기장판을 발견하고 어찌나 기뻤던지. 집에까지 무겁게 들고 트램을  고생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3  정도로 생각보다 가격도 저렴했다.  봐도 허접하게 생기긴 했지만 저렴한 가격에 추위를 막아주는데 전자파 차단은 전혀 될거 같지 않은 생김새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대형마트에 들른 김에 이것저것 먹을거리도 좀 담았더니 짐이 제법 무겁고 크다. 커다란 짐을 이고 지고 트램을 타고 와서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집을 올라와 방 침대 위에 펼쳐놓으니 천국이 따로 없다. 이제 밤에 자다가 추워서 깰 일은 없다. 전기장판 하나로는 그래도 힘들어 보온물주머니도 장만했다.


플라잉 타이거(Flying tiger) 비슷하게 아기자기한 생활용품을 파는 매장이 스페인에도 있었다. AlE-HOP이라는 브랜드였는데 장난감이나 스마트폰 액세서리, 생활용품들을 팔았다.   귀여운 다이소 느낌이라 그곳에서 친구들 선물을 구매하거나 학용품, 홈웨어 등을 구매하곤 했다. 한국에 돌아올  친구들 기념품으로 액세서리를   곳이기도 하다. 거기서 구입한 하늘색 니트로 감싸진 보온 물주머니를 끌어안고 전기장판을 켜고 침대에 누워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누워서 노트북으로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이곳이 한국인지 스페인인지 헷갈려 기분이 묘했다. 겨울이면 한국에서도 이불을 덮고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낙이었는데 한국이나 스페인이나 사람 사는 것은 똑같다. 하지만 이왕 똑같을 거면 이곳에도 보일러가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다.



거리의 풍경도 여름과는 많이 달랐다. 해변 바(bar)나 레스토랑에 밤늦게까지 앉아 맥주나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이 줄어들더니 바닷가가 한산해졌다. 그래도 나는 매일 바다에 갔다. 여름바다와 다른 겨울 바다의 느낌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여름 바다만큼 파랗지는 않지만 겨울의 바다는 깊은 회색빛이었다. 활기참보다는 차분함과 쓸쓸함이 느껴지는 색이었다. 겨울바다는 공기와 냄새도 달랐다. 조금 더 건조하고 조용하며 소금기도 덜했다.



관광객도 줄어들어 겨울 바다를 거니는 이들은 대부분 알리칸테 주민들이었다. 산책을 나온 가족들이나 연인들 친구들. 여행 온 것이 아닌 그 사람들은 해변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렇게 모두 잠시 있다 떠나가는 바다에 오래도록 앉아서, 바뀌는 사람들과 그 자리에 있는 바다를 보며 멍을 때리고 있는 것이 좋았다.




 알리칸테의 겨울은 조용하며 떠들썩했다. 버스나 트램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신이 나서 수다를 떠는 사람들은 사라지고 다들 차분히 겨울 외투를 입고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밤늦도록 노상 테이블에 앉아 맥주와 와인과 함께 고성으로 수다를 떠는 풍경도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있을 연말 축제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겨우내 계속된 축제 기간 동안 거리에 모여 불꽃놀이를 하고 가면을 쓰고 분장을 하며 핼러윈을 즐겼다. 나에게 스페인 여름이 파란색이라면 겨울은 빨간색이다. 여름의 스페인은 파란 하늘과 바다, 야자수가 어우러진 해변에 모인 사람들이 떠오르지만 겨울은 안전장비도 없이 횃불을 들고 인간 톱을 쌓으며 불꽃놀이를 하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계절모두 스페인 사람들은 술과 큰소리의 대화와 웃음이 함께였다.


비가 오고 추운 겨울이면(눈이 내린 적은 거의 없었다. 내가 머무는 시기에 한번 잠깐 눈이 내렸는데 선생님은 알리칸테 살면서 10여 년 만에 들은 눈 소식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먹던 따끈한 국물요리와 붕어빵, 호떡이 떠올랐다. 알리칸테에서 간식거리를 파는 노점은 볼 수 없었다. 그럴 때면 중국인 마트에서 사 온 한국 라면을 끓여 먹었다. 라면 국물에 온몸이 따끈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스페인 사람들은 모르는 기쁨이다.



12월이 되니 연말 분위기이다. 곧 있을 성탄을 대비해 집안을 꾸미고 거리 곳곳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놓고 크리스마스 소품들을 진열해 놓는다. 백화점이 있는 거리도 한껏 꾸며놓았다. 한국에서 보던 화려한 전구나 트리에 비하면 오히려 소박하다. 눈이 없이 장식되어 있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며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어렵겠지 싶다.

백화점 장난감 코너에 아빠들이 줄을 서서 선물을 사고 있고 식품관에도 쇼핑을 나온 가족들이 장을 보고 있다. 밖에는 반팔에 스카프를 두른 행인과 패딩을 입은 행인이 뒤섞여 걸어가고 있다.

스페인은 겨울에도 매력적인 나라다. 여름과 겨울을 모두 경험할  있어서 여기서 살아보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생활치료센터 근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