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늦은 아침, 아니 아점을 먹고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한다. 온 가족이 외출을 하려면 내가 제일 바쁘다. 밥을 해서 그들을 먹여야 하기에, 밥을 하는 동안 짬짬이 화장도 하고 머리도 매만진다. 밥이 다 되면 그들을 먹이고, 내가 또 설거지를 하는 동안 그들이 외출준비를 한다. 이 불공정한 배분을 평생 해왔으며, 공정한 배분을 위하여 싸움도 불사하였지만 별로 달라지지 않는 질서를 실감하고는 그 싸움을 스스로 체념했다. 어차피 내가 다 해왔으므로 내가 끝까지 해보자는 심산도 있으며, 내가 살린 그들이 밖에 나가서 그들의 위치에서 자신의 몫을 훌륭하게 소화해 내고 있기에 이제는 내가 스스로 자처하는 몫이기도 하다. 더 늙어서, 내 몸이 더 힘들어지면 그때 가서 다시 논의해 보기로 하고 일단 현재는 불공정한 몫을 잘 수행하기로 한다.
이제 외출 준비를 다 끝낸 그들과 동시에 집을 나선다. 오늘의 미션은 쇼핑하기이다. 며칠 후, 딸아이의 졸업식이 있다.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우면서 언제 다 클까 싶었던 아이가 이제 졸업을 하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다. 그 옛날, 순조롭게 사회에 첫발을 내딛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렇게 성인기를 맞이하는 아이가 기특하고 대견하고 그저 자랑스럽다. 그러니 오늘은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쇼핑을 하기로 한다.
스타필드에 도착하니, 사람이 너무도 많다. 사람 많은 장소에 가면 갑자기 기가 쏙 빠진다. 우리는 최대한 빨리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질주한다. 학위복 안에 입을 정장과 구두를 산다. 옷을 입어 볼 때마다 감탄사를 연발한다. 젊음은 무엇을 입어도 예쁘다. 그 탄력적인 몸짓과 표정이 그 자체로 빛이 난다. 출근할 때 입을 여벌의 옷도 사고 가방도 사고 나니 3시간이 훌쩍 넘었다. 3시간의 쇼핑으로 이미 만보를 넘게 걸었다. 오늘의 미션은 두루두루 성공이다. 다리가 아프고 배도 고파져서 폴바셋 앞에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렸다가 달달한 시나몬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이제 아이가 출근을 하면, 일에 적응하느라고 이런 달달한 시간이 당분간은 없을 듯하여 더욱 애틋한 쇼핑시간이기도 했다.
쇼핑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소록소록 비가 내린다, 봄비다. 알에서 깨어나는 서막부터 비가 내리는 것은, 비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축복이 내리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더욱 몽글몽글해졌다.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본다. 빗물을 손가락으로 느끼며 실재하는 삶의 감각을 마음에 새긴다. 뼛속까지 감사한 날이로구나. 이렇게 윤기를 잃어가는 삶의 나이에도 내가 힘을 얻고 살 수 있는 것은, 빛나는 너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빗줄기처럼 가슴에 내리 꽂혔다.
사랑하는 내 아기! 너의 빛나는 출발을 축하한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너 자체로 아름답고 당당한 사람이 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