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
여인초 또는 극락조라고 불리는 이 나무의 정확한 명칭은 traveler's tree이다. 여행자의 나무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줄인 말로 여인초가 되었다. 극락조화과에 속하며 다른 이름으로는 부채 파초이다.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가 고향이고 야생에서는 15m까지 자란다고 한다. 너비 3m나 되는 넓은 잎에 물이 고이면 그 물을 여행자들이 마실 수 있고 그 나무 아래서 쉬었다 갈 수 있어서 여행자들의 나무가 되었나 보다. 야생에서는 잎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부채처럼 갈라진 형태다. 이 나무가 관상수로써 실내에서 자라는 동안은 잎이 갈라지기라도 하면 큰일 날 것처럼 마음 아파하지만 야생에서는 그렇게 갈라진 형태가 자연스러운 것이란다.
작은 여인초를 만원에 사서 일 년을 키우니 1m 정도 되었다. 나무 하나가 어쩐지 허전해 보여서 30cm 정도의 작은 나무를 같이 심어주었더니 더욱 풍성하게 자라고 있다. 요 며칠 저렇게 새 잎이 돌돌 말린 채로 나오고 있는 중이다. 우리 집 거실 안쪽, 반그늘에서도 잘 자라고 있어서 물은 일주일 한번 듬뿍 주는 정도다.
꽃말은 ‘영원불변, 신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 란다. 세상에나! 자유로움은 두려움이 없어야 하는구나, 타는 듯한 아프리카에서 신비로 남으려면 변하지 않는 초록을 커다랗게 품어야 하는구나. 대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라는 것이 세상에 있기는 한 것인지 의문스럽기는 하다만 식물 감각을 사람이 알 수 없으므로 허공으로 뻗어나간 이파리들의 자유가 부러울 따름이다. 목마른 자들이 목을 축이고 힘을 얻어 여행을 지속할 수 있도록 기꺼이 커다란 잎과 줄기의 수액을 내어준 나무는 아프리카이기에 그 신비함이 더 하였으리라. 이렇게 아프리카의 열정을 품은 나무를 거실에서 키운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다.
살다 보면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 나도 모르게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을 때가 있었다. 나는 분명히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의도된 것처럼 커다란 오해와 반향을 불러서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내가 하지도 않은 말들이 무성한 소음을 달고 윙윙 거린다. 벌집을 건드린 벌로, 벌에게 쏘여야 되는가. 그럴 경우, 상황에 따라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억울하고 불쾌한 상황은 시간이 많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비워지기가 어렵다. 공들여 기른 손톱이 가끔씩 스치면서 내 살을 할퀴듯이, 불쾌함이 때때로 마음을 할퀴고 가는 날에는 세상이 두렵다.
두려운 날, 여인목을 바라본다. 이른바 풀멍이다. 커다란 이파리들이 허공으로 유연하게 뻗어있다. 자체로 자족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자기 맘대로 뻗어 나간 듯이 보이는 이파리 속내에서 새삼스레 당당한 격을 마주한다. 유연함은 저 당당함에서 나오는 것이었을까. 이파리가 상처를 입든, 찢기든 개의치 않고 여행자들에게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준 여인목의 영혼을 느껴 본다. 그렇다면 자기 영혼을 기만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당당한 사람은 저절로 유연해지는 것이겠다. 자유로운 영혼, traveler's tree여, 내 영혼도 쉬어 갈 수 있게 해 줘서 고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