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물들이는 시간
십오 년 전, 작은 나무를 만났다. 처음 보았을 때 작고 가냘픈 나무가 이파리들을 무수히 매달고 운치를 자아내는 자태가 신묘했다. 신묘한 나를 키워주세요, 말하는 듯 이파리들의 떨림이 달빛 아래 교교한 물결과도 같았다. 결국 그 작은 나무를 집에 들여 키우고 있다. 그리고 십오 년 동안 수도 없이 곁가지를 내어서 많은 이들에게 나눔을 선사하곤 했다.
처음에 30센티 정도였던 나무가 지금은 1미터 70센티를 훌쩍 넘는 장대한 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키가 고정된 채로 몇 년을 지나고 있다. 키우면서 물을 깜박하고 조금 늦게 주어도, 또 어느 날은 갑자기 물을 많이 주어도, 그 어떠한 탈도 없이 잘 자라고, 잘 멈춤을 했다가, 또 조금 자라기를 반복하는 나무다.
그 나무의 이름은 남천나무다. 고아하다, 고혹적이다, 고고 하다의 수식어를 다 갖다 붙여도 아깝지 않다. 그중에서도 단연 한 가지를 꼽으라면 고혹이다. 빨갛게 물든 이파리들의 고혹적인 자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어떤 고혹적인 자태가 남천의 고혹만큼 평화로울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남천의 꽃말을 찾아보니 전화위복이다. 아하, 너의 평화는 그냥 얻어진 평화가 아니었구나! 세상 풍파 다 겪고, 풍비박산 나고, 더 이상 바닥일 수도 없을 것 같은 찰나에 오히려 그것이 복이 되어 터닝 포인트의 길이 열리는 순간, 그다음에 찾아오는 평화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화려한데 화려해 보이지 않고 고혹적으로 은은하게 물들이며 교교한 이유가 충분하다 싶은, 남천 나무다.
이승우의 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에는 지상의 낙원으로 상징된 남천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그 남천이라는 장소는 책 속 인물들의 얽히고설킨 사랑의 관계를 더 이상 슬픔이나 아픔이 아닌 신화적 로맨스로 승화시킨다. 그리하여 전화위복을 맞이하는 것이다. 소통하지 못했던 가족이 소통의 첫 뿌리를 내리고, 두 다리가 잘려나갔으나 마음의 뿌리가 뻗어나가고, 말을 하지 않아도 깊고 깊은 사랑의 뿌리가 그들의 사랑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그야말로 유토피아 같은 지상의 낙원으로 탈바꿈을 시켜버린다. 오랜 시간 식물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던 그들의 사랑이 남천이라는 장소에서 뿌리를 내리더니 식물 같은 사랑을 숭고한 뿌리가 감싸 안음으로써 더 안정적이고 견고한 희망을 예견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책 속의 남천이란 장소가 남천의 꽃말에서 비롯된 설정인지는 모르지만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나의 나무 남천을 곁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내 삶에서 전화위복의 순간은 언제였을까. 내 생애 최고의 전화위복은 불행의 늪에서 탈출하려던 결혼이었을까. 결혼으로 피워 올린 아이였을까.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 인지 모를 일이지만 그 모두가 내게는 복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내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복이 되어 뿌리내린 사랑이 우리를 감싸 안아 어떤 순간에도 흔들림 없이 견고하게 이 자리를 지켜나가게 하는 것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견고하게 뿌리를 내려서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책에서는 남천이란 장소가 그런 곳이었지만 내겐 남천 나무가 자라고 있는 이 집이 낙원인 거라고, 나의 남천 나무가 여전히 빨갛게 물든 모습으로 내게 알려주는 것이다. 복은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물들이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아야 그토록 말간 고혹과 평화를 함께 할 수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