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하지만 내 삶에서 강인하게 서다
‘마오리소포라’ 는 뉴질랜드에서 온 자생식물이다.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의 강인함을 닮아서 마오리소포라 라고 이름 지었단다. 쪼그만 잎과 가냘픈 줄기가 위태롭게 이어져서 사실, 강인함과는 거리가 멀게 생겼다. 그러나 또 세상사 이치로 본다면 강한 것은 한 번에 부러지기도 하나 약한 것은 질기고 오래가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세히 보면 꽤나 안정적인 구조를 가지고 우아한 형상으로 자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뉴질랜드의 어디쯤에서 어떻게 자라는지는 실제로 본 적은 없다. 바람이 많이 부는 척박한 환경에서 어렵사리 자란다고 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런 환경에서 생겨난 것들은 빈티지 아우라를 풍긴다. 빈티지는 사람의 마음을 아련하게 휘감는다. 빈티지한 것들을 바라볼 때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정서가 나를 압도하는데 그것이 그리움인지, 서글픔인지, 알 도리가 없다. 사실 이것도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그러다가 퍼뜩, 어렸을 때 시골에서 보았던 싸리나무로 만든 울타리가 떠올랐다. 할머니 집 뒷마당에는 싸리나무 울타리가 있었다. 무수히 얇은 가지들로 엮어서 만든 싸리나무 울타리가, 어린 내 눈에는 그것이 울타리라고 하기엔 너무 가냘프고 안타까운 부속물쯤으로 보였다. 저런 울타리로 대체 무엇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산짐승들이 장독대로 내려오는 것을 막기에는 턱없이 빈약하지 않은가. 게다가 죽은 나무가 번듯한 가구로 탄생되는 여타의 나무와 달리 싸리나무 울타리는 선사시대 움막집의 울타리처럼 유물로 보이기까지 했다.
해 질 녘이면 그 싸리나무 울타리에 소슬한 애수가 내려앉았다. 여섯 살 아이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아슴아슴 해가 산을 넘어가서야 비로소 할머니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여러 날을, 여섯 살 아이가 견디기에는 너무 벅찬 감정을 혼자 누리고, 감당하면서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주인공 제제처럼 철이 들어버렸다. 나는 지나치게 일찍부터 고독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수 세월을 건너서 인제서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차오르게 해준 빈티지스러운 마오리소포라를 화원에서 단번에 사 가지고 집으로 왔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가냘프게 휘어지다 말다를 반복하는 가지를 잉태한 마오리소포라가 꼭 싸리나무 같아 보여서, 살아 있는 나무를 유물 바라보듯 오래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이제 나는 싸리나무 울타리의 애수를 닮은 마오리소포라를 오래오래 잘 키우고 싶어졌다.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린 나를 다독이듯 가냘픈 마오리소포라를 쑥쑥 키워서 싸리나무 닮은 것들을 보아도 더 이상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그래서 약하지만, 위태롭지만, 오랜 시간 고독으로 단련된 내가 비로소 마오리소포라처럼 안정적인 구조를 가지고 내 삶에서 강인하게 서 있기를 바란다.
*** 코로나 확진 판정받고 딸아이 몸에 마비증세가 시작되어 격리병동에 입원시켰다. 휠체어에 실려 격리병동 엘리베이터 문앞에서 헤어지고 꼬박 하루밤동안 연락이 안 되었다. 천년 같은 하루가 지난 것이다. 이제 안정을 찾았다고 연락이 오자 그때부터 긴장이 풀어지면서 내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열이 40도까지 올랐는데도 제대로 아프다고도 말도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약을 먹고 계속 누워만 있었더니 차츰 열은 내렸다. 근육이 무진장 아프지만 잠깐 일어나 예전에 쓰다만 글을 마무리해서 올린다.. 엄마라는 이름은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