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도 모르는 실존이며 현존
나르시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서 빠져 죽은 자리에 꽃이 피었다. 물 水, 신선 仙, 이름하여 수선화다. 속명 Narcissus는 그리스어 narke(마비)에서 유래되었으며 영어 이름으로는 daffodil이다. 원산지는 지중해 연안이지만 중앙아시아를 통해 한국과 중국으로 전해져 수십 종이 피고 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추사 김정희가 ‘맑은 물에서 해탈한 신선을 본다’고 예찬하여 雪中花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얼었던 땅을 뚫고 올라와서는 찬란하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일품인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애, 고결, 신비라고 한다.
젊어서는 수선화가 예쁜지 몰랐다. 그러다가 어느 날 지천으로 피어난 수선화를 보게 되었는데 그 생김새가 홀연히 눈에 들어왔다. 꽃부리가 봉긋하게 올라온 왕관의 모양을 하고 있다. 특이했다. 왕관 꽃부리 옆으로 꽃잎이 펼쳐져 있다. 마치 꽃잎이 왕관을 지켜주는 모양새다. 아, 수선화의 꽃말이 왜 자기애인지 꽃의 형상이 말해 주고 있었다. 펼쳐진 꽃잎으로 인해 바람이 불어도 왕관을 고고하게 지탱할 수 있고 균형도 잡아주는 듯 보였다.
퍼뜩 ‘왕관을 쓰려는 자여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문장까지 떠올랐다. 셰익스피어가, 권력에는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는 뜻으로 쓴 문장이지만 또 다르게 해석하면 우리는 각자 자기 인생에서 왕관을 쓴 주인이며 왕이다. 그럼에도 왕관을 쓴 주인이 되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고 살았다. 나의 젊음은 경쟁사회에서 부대끼고 사느라 내면을 저 깊숙이 들여다볼 시간이 많지 않았다. 수많은 사회적 관계가 연결되어 있었으면서도 늘 찾아오는 외로움이나 고립감을 사회성이 부족해서인가라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아이가 성장하고 비로소 내 시간이 생기면서 존재라는 것에 대하여 내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나는 기필코 내 삶의 왕관을 쓴 주인이 되어야만 했다. 삶의 무게는 아팠다. 아픔을 견디는 실존은 그 어떤 관계에 대한 해석보다 더 강력하여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현존이다. 나라는 자아는 오롯이 나만 느끼는 고유한 존재감인 거다. 존재하는 것은 현존을 사는 것이고, 현존을 참아내는 것이며, 현존을 겪어내는 것이어서, 나만 아는 아픔은 홀로 고독을 안고 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먼 길을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은 하느님도 모르는 실존이며 현존이다. 실로 고독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내 삶을 사랑하고 내가 쓴 왕관을 다치지 않고 지켜내려면 당연히 자기애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수선화는 그래서 멋진 꽃이라고 기억되고 말았다. 고독은 저 홀로 안고 가는 것이라고, 수백 송이 수선화가 들판에서 왕관을 각각 쓰고 봄바람을 견디며 한송이한송이 고결하게 서 있었다. 신비로운 수선화 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