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하 Aug 24. 2022

다정하게 걷다, 다정큼나무

중년이라는 경계를 걷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목에 핀 꽃나무의 이름을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 나무도 봄이 되면 꽃이 활짝 피었으나 내 눈에 화악 들어오지 않고 그냥 흔한 꽃나무였다. 그러다가 문뜩 그 익숙함이 익숙하게 보이지 않고 게슈탈트 현상처럼 꽃나무가 통째로 각인이 되어서 길을 가다 말고 사진을 찍어 검색을 했다. 사진 그대로 검색 기능이 가능한 네이버가 이렇게 친절한 포털이었나를 실감하면서 말이다. 이제 기기만 잘 활용해도 세상에 피어 있는 꽃들의 이름을 아주 편리하게 알게 되겠다.


그 꽃나무는 이름하여, 다정큼나무란다. 히얏! 얼마나 다정함이 많으면 ‘다정’이 큼지막하게 들어가 있나. 이름만큼이나 다정하게 몽글몽글 모여 있는 꽃잎들을 보고 있노라니, ‘다정’이 한 다발, ‘다정’이 한 움큼, 가슴에 차오르며 갑자기 길 한가운데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세상천지에 다정하느라 나 자신에게 다정한 적이 있었나? 그런 생각이 미치자 이젠 몽글함은 사라지고 서러움이 복받쳐 꺼억거리느라 길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버렸다.



집속에 몸 몸속에 집 하므로

집속에 집이고 집 밖에 집이라

몸속에 몸이고 몸 밖에 몸일

수밖에.....



화가 윤석남의 그림책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의 한 구절이다. 그녀는 ‘집속에 몸 몸속에 집’이 비대해져서 자신을 돌보지 못하다가 비로소 내방이 생긴 어느 날, 까만 자루 끝에 매달려서 눈만 겨우 내놓고 여태껏 안 보이던 것들을 본다. 너무 바빠서 자기 몸도 잃어버리고 허공에 뜬 채로 삶이 돌아오기를 온몸으로 기다린다. 백만 번 전쟁한 것 같은 사이(남편)와 어여쁜 딸을 키우며 여전히 멋져 보이고 싶지만 밥그릇을 12개 쌓아 올린다고 마법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정 씨는 무엇을 위해 살았던 것일까. 혹여 나는 다정 씨처럼 살지는 않았나.


엄마이고 아내이고 몇몇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느라 내 시간조차 홀가분하게 쓰지 못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만든 족쇄였다. 무언가를 포기하며 유예시킨 시간들이 쌓여만 갔지만 나이를 먹어도 몸은 안 늙는 줄 알았던 것일까. 내가 제 존재의 우물을 깊게 퍼 올려야 하는 나이가 됐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예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몸과 마음을 되돌려 주었다. 그 많던 열정과 호기심이 사라지고 어느 날 나는 번아웃 진단을 받았다. 그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게 무기력해지는 나를 목도하고도 나는 나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더 이상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덧없음, 허무, 우울, 중년이라는 이름에서 오는 몸과 마음의 불일치,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겼던 갱년기, 내가 좋아서 했던 일이 주는 중압감, 일만 하기에도 바빠 죽겠는데 매일매일 해야 하는 살림, 무엇 하나 가볍지가 않았다.


길을 잃었다. 삶의 궁극이 무엇이었든 애초에 목적 설정이 잘못되었던 삶의 한 복판에서 미아처럼 서 있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나의 세계, 다정 씨 그녀처럼 어디엔가 들어가 있을 진짜 내 방을 갖지도 못했는데 벌써 길을 잃으면 나이를 어떻게 더 먹어가며 살 수는 있는 것일까 라는 고민도 잠시였다. 여러 달을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며 겨우겨우 수업을 하고, 겨우겨우 살림을 하고, 겨우겨우 잠을 잤다. 익숙했으나 익숙해서 더 나를 들여다보지 못하는 나날들의 연속이었고 더는 참을 수 없는 벼랑에 이르러서야 몹쓸 진단이 내려졌던 것이다.

 

이쯤 되고 나니 길을 찾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한밤중에 눈을 떴을 때, 바닥으로부터 공포가 썰물처럼 엄습해오면 존재 자체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수직으로 내리꽂는 자존감이 깃털만큼이나 가벼워져서, 위협적인 나는 없어져야 된다는 극단의 감정까지 솟아났다. 그러다가 어느 날 베란다 난간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럴 때마다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매고 집을 나섰다. 새벽이고, 밤이고, 시간만 나면 걸었다. 매일매일 걷는 동안 무슨 변화라도 일어난 걸까. 발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로 인하여 지금 여기 존재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궁극의 깨달음이 찰나적으로 획 지나갔다. 세상에나, 사방이 길인데 걷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았던가. 그렇게 걷다가 다정큼나무를 만나서 철퍼덕 앉아 목 놓아 울고 나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다정큼나무의 꽃말은 친절, 친밀이란다. 이름도 다정한데 친절하기까지 하다. 아, 길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집을 살리고 가족을 살리는 동안 스스로에게는 한 번도 다정하지 못한 ‘나’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인제, 세상천지에 다정하기보다는 나 스스로에게 다정도 하고 친절도 하기로 하자.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의 흐르는 땀과 다정한 그녀의 꼬부라진 등으로 이어지는 작은 존재들과의 공생이 아름답기에 충분한 것처럼, 작은 꽃잎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제 존재를 드러내는 다정큼나무의 발견으로 얻어지는 깨달음이 비로소 내가 사는 세상에서의 공생이고 아름다움이다. 이렇게 하늘과 땅 사이를 두발로 새기며 걷다 보면 하나 두울 안 보이던 것들을 또 볼 수도 있겠다. 여전히 불확실하고 모호한 중년이라는 경계를 다정하게 잘 걸어서 내 것과 남의 것의 경계가 억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오늘도 내일도, 걷다가 ‘다정큼나무’ 같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다정씨’를 떠올리며, 까만 자루 속의 그녀처럼 두 눈을 열고 바라보며 걷기로 하자. 애초에 길이 있었든, 없었든, 지금 여기 내가 나인 채로 더 가까이 나를 돌보며 다정하게 사랑하기로 하자.


나를 무겁게 누르던 우울과 불안의 정령들이여, 나를 사랑해다오.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다 해 보았으니, 여기 무기력한 나를 사랑해다오.




*** 브런치를 시작할 때쯤, 지난봄에 쓴 글입니다. 여러 달을 우울과 번아웃을 반복하다가 다정큼나무를 발견하고 나서, 브런치를 시작했답니다. 지금은 어떠냐구요? 헤헤!

이전 11화 내 몸을 지나가는 나무의 빛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