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열쇠로 구멍을 열다
친구가 3년 전에 생일 선물로 화분 하나를 들고 왔다. 특이하고 감각적인 이파리를 가진 식물이었다. 처음에 20센티였던 풀이 지금은 1미터를 넘는 나무가 되었다. 라틴어 monstrum에서 유래된 이 나무의 이름은 몬스테라다. 잎 모양이 특이해서 생겨난 이름이란다. 특이하다, 특이하다, 읊조린다. 특이하기 때문에 이국적이고 특이하기 때문에 더 눈에 띈다. 그러나 정글에서는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을 것이다. 정글의 거대한 나무 밑에서 햇살을 어떻게든 받아서 살아 보겠다고 자기 잎에 구멍을 내면서 생존한 거다
어쩐지 내 삶도 몬스테라를 닮았던 날들이 있었던 거 같다. 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말이 없었으며 낯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는 날들이 많았으니까. 그 눈에 띄지 않는 나를 발견해 주신 선생님이 불현듯 생각난다. 고 2 때 미술 선생님은 명망 있는 화가이셨다. 어느 날, 미술시간에 그림을 검사받는데 선생님이 나를 한참을 바라보시더니, 이내 그림을 한 장 더 그려오라고 하셨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선생님이 하라고 시키시니, 집에 가서 그림을 한 장 더 그렸다. 그렇게 그려간 그림을 선생님은 예의 그 깊은 눈빛으로 들여다보시면서 미대에 가고 싶지 않느냐고 하셨다. 하지만 그 당시 나의 가정형편은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셔서 온신경이 아버지의 마비된 팔다리에만 집중되어 있던 터라 내가 무엇을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결국 선생님의 애정 어린 조언을 가슴에만 담고 말았다. 상처받은 자아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도 전에 기민한 선생님들의 말 한마디는 아이들에게 실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그때 나는 알았다.
이후로 다른 전공을 선택하고 뒤늦게 메이크업 학원을 다닌 후에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을 했다. 그것은 선생님의 그 한마디가 내 가슴에 회한으로 남아있던 까닭에 선택한 생존 열쇠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중간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예민하고 산만한 정서들이 넘쳐나는 나를 선생님은 그림에서 한눈에 알아보셨을까. 나는 정말 그림을 제대로 배워서 그림을 그렸다면 다른 인생을 살았을까. 생각의 뿌리들은 언제나 답도 없이 서성거리게만 한다. 그러다가, 가을 한낮 거실에 누워 바라본 몬스테라의 뿌리가 내 눈에 확 들어왔다. 아, 너도 그렇게 살고 있었구나, 라는 알아차림으로.
몬스테라의 꽃말은 예민하다 또는 헌신하다, 이다. 예민하지만 환경에 적응하느라고 뿌리를 거실 바닥으로 드리우는 몬스테라를 보니, 어쩌면 예민하고 민감하기에 환경에 적응을 놀랍도록 하는 내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느라고 늘 에너지를 고갈되도록 쓰는 나는 번번이 한 번씩 우물 바닥까지 박박 긁어 먹은 우물처럼 텅 비어서 정체성이 무엇이었는지 종종 잊기도 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본시 우물이라는 것은 또 바닥에서 채워지면 우물의 모양을 하는지라 찰랑, 우물 인척 또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또 몬스테라가 살기 위해 자기 잎에 구멍을 내면서 자라는 모습은 나도 살기 위해 내 가슴에 구멍을 얼마나 내었던가를 생각하게 하는 거다. 그 구멍을 자라는 동안에는 결핍이라고만 했으나 이제 나이 들어 바라보는 구멍은 나를 키운 자양분이라 믿고 싶다. 부족한 구멍을 메꾸려고 노력했던 날들은 나의 습관이 되었고 그 습관은 끝끝내 지금의 성격까지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보아라. 그 특이한 구멍 덕분에 몬스테라는 얼마나 세련되고 개성적인가. 게다가 이국적이기까지 해서 몬스테라를 한참 바라보면 내가 사는 집에 정글이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내가 몬스테라처럼 특이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 세련됨의 반의 반 만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나는 승화된 거라고 위무하고 싶다. 이제 나는 그토록 오랫동안 생각만 해오던 일을 벌이려고 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 생각을 더 이상 생각으로만 머물지 않고 실행하기 위함이라. 이 가을, 내 마음에 신을 들여놓고 기도 한다. 겨울이 오면 그림을 그리러 가련다. 몬스테라처럼 매력적인 그림을 그리기를, 꼭 그러하기를, 그날은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